[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45) 약속시간은 지상명령

정부에서 일할 때 비서가 스케줄 못 맞추면 모욕수준의 질책 박봉이어서 용돈이 월급보다 더 많아 부인이 생활전선 전담

2021-01-12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김학렬

영화관 데이트 불발이후  쓰루와 부인 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까지도 약속시간 훨씬 전에 만날 장소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게 불문율처럼 되었다.

출국의 경우에는 적어도 3시간 전에 공항에 가 있어야 하고, 국내 여행의 경우에는 1시간 반 전에 공항에 도착해야 하는 것이 '식구 룰'이었다.

그 식구 룰은 은근히 주변 사람에게도 권장되곤 했다. '우리 식구'인 비서 등은 당연히 식구 룰 적용 대상이었다. 훗날 정부에서 일할 때 직원이 업무를 스케줄에 맞추지 못할 경우 쓰루의 감정이 인격 모독적으로 거칠게 표출되곤 했는데, 그 배경에는 약속에 대한 쓰루 부부 두 사람의 강박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집안은 쓰루 쪽이 기울었다. 기울고 자시고 할 '집안'이란 게 없었다. 친척을 포함한 집안과 그 연줄, 재산, 태어나 자란 곳 등 모든 면에서 두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김옥남은 (서울보다 훨씬 크고 부유하고 현대적 도시였던) 오사카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현대 여성'이었다. (해방으로 대학에 다니지 못한 점에 따른 그녀의 학력 열등감은 만사 제치고 자식의 학력을 높이는 데 반영되었다.)

쓰루의 장인이 될 사람은 오사카에서 신발 공장을 할 정도의 자산가였다. 전쟁 통의 신발 공장은 엄청난 축재의 기회였다. 그의 장인은 오사카의 그 많은 재산을 한국으로 들여오지 못한 채,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전에 죽음을 맞았다. 김 여사에게 남은 것은 '옛날에 부자였다'는 기억과 돈벌이 유전자뿐이었다.

김학렬은

그녀가 사람들에게 자주 들먹였던 친척으로는 6·25 동란이 발발하였을 때 국방부 장관이었던 신성모 씨가 있었고, 이모라고 부를 정도로 친분이 있었던 임영신 상공부 장관(중앙대학교 설립자)이 있었다. (신성모는 6·25 때 북의 남침에 대비하지 못한 데다 서울 시민을 팽개친 채 자기네만 피란 가기 바빴다는 이유로 한동안 무책임한 관료의 상징이었다.)

그녀에 비해 쓰루는 본인이 똑똑하다는 것 외에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 한국 안에서조차 뒤처지는 고성 출신 '촌놈'인 데다가, 연줄이 닿는다고 할 만한 친인척 중에 신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집안 재산이라고 해봐야 논 몇 마지기와 읍내의 초가집이 전부였다.

배경 차이에서 오는 그의 열등감은 모든 '(권력을) 가진 것들', '(재산이) 있는 것들'에 대한 반발심과 강한 출세욕으로 표출되었다. '장사하는 놈들은 다 사기꾼', '정치하는 놈들은 입만 가지고 사는 무식한 놈들' 등등 그의 입에 오르내리는 재력과 권력은 다 나쁜 것이거나 모자란 것들이었다.

그가 몸담게 되는 정부 관직만 배운 자 또는 의식 있는 자가 추구할 만한, 깨끗하고 의미 있는 직분이었다.그래서 그녀에게 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머리뿐이었다. 학력, 재기, 순발력 등등. 그렇다고 '머리'에서 그녀가 그에게 뒤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랬듯이 그녀는 남 앞에서, 특히 자식이 보는 데서는 철저하게 '가장(家長) 우선'이었다.

남들 보는데서 부리는 그의 객기나 그녀를 내려다보는 태도는, 남의 눈이 없어지는 순간 그녀의 입으로 또 행동으로 제 합당한 자리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6·25 전쟁이 터지기 한 해 전인 1949년에 결혼했다. 남자가 앞서가면 여자는 뒤따라가는 게 상식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는 남녀평등이었다. 아니, 김옥남의 영향력이 우위에 있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김 여사는 집안 배경 덕분인지 사업과 축재에 강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는 전쟁 중이건 피란 시절이건, 예리하게 돈 냄새를 맡는 능력을 발휘해 집안 재산 증식을 주도했다.

쓰루는 반대였다. 스스로 자기는 돈벌이 재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수준이 떨어지는 돈벌이'는 '머리가 뒤지는' 김 여사 몫이었다. 그와 그녀 사이에 자연스럽게 각자 비교 우위에 따른 역할 분담이 생겨났다. 남자는 바깥일, 그중에서도 돈벌이와 상관없는 직장 일에 집중하고, 그외의 모든 것, 특히 친인척 다루기, 자식 교육, 재테크 등 크고 작은 집안일은 여자 몫이었다.

그녀는 우리나라 복부인 1세대였다.얼핏 보면 '남자는 밖, 여자는 안'이라는 점에서 여느 부부와 비슷한 것 같지만 중대한 차이가 하나 있었으니, 주(主) '돈벌이'를 남편이 아니라 부인이 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평생 월급 전부를 부인에게 가져다주었는데, 그 돈보다 부인에게 타 쓰는 용돈이 더 많았다. 당시 박봉의 많은 공무원 집안에는 그런 '부부간 역할 분담'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