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37)남덕우 재무장관의 내공

경제부처 손아귀에 넣었지만 南재무 등장이후 '기획원-재무부'상하 관계에 틈 생겨 교수출신이라 평가절하했지만 정책 추진력과 남다른 정치력에 '이 친구 봐라' 경계 찾아올땐 딴청 부리며 '홀대'…남 재무는정면대결대신 우회하면서 '자기 영역' 고수

2020-11-16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김학렬

쓰루가 함부로 할 수 없는 경제장관이 한 명 있었으니, 바로 남덕우 재무장관이었다.

왕초처럼 쓰루도 부총리 때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자신의 경제팀을 구성할 수 있을 정도로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재무장관만큼은 그가 골라 쓸 수 없었다. (그가 1969년 10월 '쓰루 팀'을 구성하는 개각 때 대통령에게 재무장관감으로 천거한 사람은 경과심 위원인 이기준 국민대 교수와 조익순 고려대 교수 두 명이었다.)

"처음엔 교수 출신이라 쉽게 보았으나 보통이 넘는 정치력과 내공을 보이자 '이 친구 봐라' 하며 놀라워했다. …… 그래서 김 부총리는 남장관을 테스트하기 위해 잽을 자주 넣었다. 남 장관이 부총리실로 찾아오면 일부러 엉뚱한 전화를 걸거나 모른 체하는 등의 수법을 쓰기도 했다. …… 더러 신문지상을 통해 기획원과 재무부가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성질 급한 김 부총리가 정면으로 나서 반박을 하려는 것을 참모들이 겨우 말려 기획원 예산국장이 대신 싸우게 했다."(최우석 증언)

1971년

쓰루와 남 재무 간의 껄끄러움이 주로 그의 급한 성격에서 연유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남 재무에 대한 그의 '급한 성격'의 뿌리가 그의 강한 현실주의에 있었다는 점을 꿰뚫어 보는 이는 많지 않다.

그가 부담스럽거나 껄끄럽게 생각하고 성질까지 부린 것은 남 재무의 학식이 아니라 '학자연(然)'하는 업무 태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책 결정을 하고 집행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 한시가 바쁜 때에, 남 재무가 서로 잘 아는 정책 사안에 관해 귀에 잘 들리지도 않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며 장광설을 늘어놓는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관련해 시중에 돌아다니던 이야기 하나가 있다. 어느 날 남 재무가 그에게 '산업 합리화' 자금 배분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었다. 도중에 그가 남 재무에게 뭔가 말려들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그는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는 등 불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30분 정도의 장광설을 펴던 남 재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펫 위에 서류를 집어 던지며 "이따위 식으로 국가 시책을 다뤄서 되겠소?" 하고 소리치고 나가버렸다. 잠시 후 남 재무가 부총리실에 와서 사과하는 것으로 사안은 마무리되었다는 게 얘기의 줄거리다.

그런데 이 일이 벌어지는 자리에 있었다는 정인용 전 부총리의 기억은 다르다. 화를 버럭 낸 것도, 제풀에 화가 풀려 사과를 한 것도, 남 재무가 아니라 쓰루였다는 것이다. 어느 설이 사실이든, 두 사람 사이가 그다지 부드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김 부총리가 다소 무리하게 몰아붙여도 남 재무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끈질기게 자기 할 일은 했다. 남 재무는 박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고 또 개인적 약점이 없었다. 나중에는 김 부총리도 남 장관의 실력을 인정하고 조심스러운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부총리 재임 기간이 늘면서 쓰루의 장악력은 날로 강해져갔다. 업무 지식, 행정 능력, 열성 등 쓰루 개인의 능력에 대통령의 무한 신임이 결합한 결과였다. 쓰루가 발의한 사항은 국무회의 무(無)수정 통과율이 90% 수준까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