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가의 맏어른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영면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보좌역이자 큰 딸 ' … 한솔 창업후 외환위기땐 담대한 구조조정, 책임경영 모범 보여 …여자골퍼 육성과 국내 미술품 보전에도 힘써
재계의 숨은 별이 졌다.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의 맏딸이자 여성 경영인의 시대를 연 이인희(91) 한솔그룹 고문이 별세했다. 1월 30일 오전 1시13분.
이 고문은 선친인 이병철 회장을 도와 오늘날 삼성의 기틀을 다지는 데 힘을 보탰고 1991년 삼성에서 분가 후 한솔그룹을 창업했다. 당시 이동통신(한솔PCS) 사업에 승부수를 걸어 재계를 깜짝 놀라게 했고 전문경영인을 중심으로 한 ‘정도경영’의 슬로건을 내걸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때 한솔은 대졸자들이 가장 가고 싶은 회사로 꼽혔다. 삼성보다 더 인기가 있었다.
1998년 외환위기 때는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서 오늘날 한솔의 기틀을 놓았다. 첨단소재와 건자재쪽으로 사업 다각화의 길을 열었다. 선이 굵고 담대한 여성 경영인이었지만 스스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다.
이같은 이 고문의 경영 행보에 재계는 “아버지(이병철 회장)의 사업수완을 가장 빼닮은 자식”이라고 평을 했다. 실제로 이병철회장은 6.25동란 이후 사업을 확장하면서 이 고문을 곁에 두고 일을 자주 맡겼다. 이 회장은 “여자도 가정에 안주하지 말고 남자 못지않게 사회에 나가서 활동하고 스스로 발전해야 한다"고 자주 딸들에게 말했다.
꼼꼼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그의 경영자질을 눈 여겨 본 이 회장은 “아들이었으면 그룹을 맡겨도 손색이 없는 재목”이라며 지인들에게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70년대 후반 신라호텔 경영을 한번 맡아서 해보라고 했다. 그때 이 고문은 호텔도 주식시장에 상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실제로 국내 처음으로 기업공개를 했다. 이를 기반으로 제주 신라호텔의 건설에 직접 뛰어드는 등 신라호텔의 사업기반을 제 궤도에 올려놨다. 이병철 회장이 이 고문을 아끼는 이유가 다 있었다.
이 고문은 평생 회장이나 대표이사란 명함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사주(社主)로서의 책임경영을 다했다. 외환위기 때의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과정에서 정부나 사회에 짐이 되는 경영을 하지 않았다.
이병철 회장이 '사람을 쓰면 믿고 믿지 않으면 쓰지말라‘는 가르침을 평생 ’경영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래서 굵직한 결정을 내린 후에 실제 현장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겼고 경영서류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
2002년 3남인 조동길(64)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긴 후에는 경영과 거리를 뒀다. 강원도 문막에 있는 종합리조트인 오크밸리를 가꾸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미술과 문화를 자연과 접목했다. 오크밸리에 세운 ‘한솔 뮤지엄 산’에는 김수근,이중섭 등 내로라하는 국내 미술가의 작품이 전시돼있고 자신이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주제지‘의 발자취도 담아냈다.
이인희 고문은 여자골프의 육성에도 밑거름 역할을 했다. 지금은 KLPGA(한국여자골프협회)가 거의 매주 대회를 열고 선수층도 두껍지만 20여년전에는 이와 달랐다. 그 때 '한솔레이더스컵'이라는 메이저 대회를 열어 여자골퍼들에게 활로를 열어줬다. 지금도 선수로 활약중인 정일미 선수를 뒷바라지하는 등 여자골퍼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 고문은 둘째아들(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에게 KLPGA회장을 맡도록 권유했고 그 때 KLPGA는 국제화의 초석을 닦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고문은 50년 넘게 골프를 즐겼다. 5번이나 홀인원 기록을 세우는 등 여성 경영인으로선 골프 실력이 단연 돋보였다. 골프는 이병철 회장의 ‘강권’ 에 못이겨 배우기 시작했고 이 회장은 큰 딸인 이 고문을 안양골프장(지금은 안성베네스트)으로 자주 불러 같이 라운딩하는 것을 좋아했다. 골프장을 세심히 관리하는 이 회장에게 스프링쿨러로 잔디를 관리하자는 제안을 한 사람도 이 고문이었다.
이 고문은 삼성가의 맏 어른 역할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가족내 파열음이 들리면 가족화합에 앞장섰다. 상속재산 분쟁이 있었을때 이건희 회장의 입장에 섰다. 그룹의 안정적인 명맥을 잇는 게 선친의 유훈이라고 이 고문은 굳게 믿었다. 장손인 이재현 CJ그룹 회장도 큰 고모를 따랐다고 한다.
이 고문은 1948년 이화여대 가정학과 재학 중에 조운해 전 강북삼성병원 이사장을 만나 결혼했고 슬하에 3남2녀를 뒀다.
조동혁 한솔케미칼 회장, 조동만 전 부회장, 한솔을 이끌고 있는 조동길 회장, 조욱형씨, 조자형씨가 있다. 발인은 2월1일 오전 7시30분. 장지는 오크밸리 인근에 마련한 가족묘원이다.
이 고문은 그의 호(청조·淸照)처럼 재계에 맑은 빛을 비추다가 양지 바른 자연으로 돌아가는 품격있는 경영인이었다. <고윤희 이코노텔링 대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