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가 창업한 고후나비의 반(半)세기 ‘손끝 봉제’
생계형 가내수공업을 ‘잠옷의 명가’로 ‘뜨개질’… ‘충성고객’들 “속옷은 고후나비가 교과서"평가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제재소가 부도를 맞아 은행 빚에 쫓기게 되자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968년 무렵이다. 뜨개질로 스웨터를 만들어 가가호호 방문 판매를 했다. 제품의 질이 좋다는 소문이 나자 주문이 쏟아졌다. 그렇게 해서 돈이 모이면 은행에 가서 조금씩 빚을 갚았다. 하도 성실히 채무를 갚아 나가자 은행이 말릴 정도였다고 한다. 꼬깃꼬깃한 현금을 들고 은행 창구에 찾아가면 일부는 생계에 보태쓰라며 돌려줬다는 것이다. 6.25 한국전쟁 때 고향 평양을 떠나 월남한 가족은 수제비로 끼니를 이어갈 때가 많았지만 ‘빚을 지고는 살지 않는다’는 결기가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실향민들처럼 그렇게 생활력이 강했다. 수제비를 밥처럼 먹던 며느리의 아들은 지금은 수제비를 멀리한다. 평생 먹을 수제비를 그 때 다 먹었다고 생각한다. 그 며느리는 ‘잠옷의 명가’ 고후나비의 고명숙(86) 창업주다. 수제비를 싫어하던 아들은 고후나비의 이성환(63) 대표이사다. 이 대표는 “할아버지는 남쪽으로 넘어와 인천에서 꽤 큰 규모의 제재소를 운영해 남 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말했다. 하루 아침에 그 제재소가 문을 닫으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어머니의 바느질’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고후나비(gohunabi)는 며느리가 창업한 이색적인 사사(社史)를 지니고 있다. 생업으로 시작한 가내수공업이 ‘중견 의류업체’로 도약한 것이다. 이 대표는 어린 시절부터 고 창업주를 거들었다. 옷감을 사오고 고객들에게 제품을 배달하는 심부름을 했다. 그렇게 등 너머로 어머니의 옷 사업을 익혀 가업을 이었다.
생업의 뜨개질 주문이 밀릴 땐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일감을 나눠줬다. 뜨개질 부위별로 일을 세분화했고 고 창업주는 그것을 조립해 완성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달리 마케팅을 안 했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주문이 들어왔다. 가내수공업 형태의 사업체제론 주문을 소화할 수 없었다. 서울 동숭동에 봉제라인을 갖추고 남대문시장에 판매거점을 확보했다. 지금의 포키아동복 상가다. 70년 2월의 일이다. 고후나비는 그 때를 창업연도로 삼는다. 처음으로 ‘고훈아’(www.gohoona.com)라는 회사 간판이자 브랜드도 내걸었다. 고객이 줄을 이었고 어떤 때는 손님이 한꺼번에 들어오는 바람에 쇼 윈도가 부서지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번호표를 나눠줬고 주말이면 장사진을 이뤘다.
인지도가 쌓이자 이번엔 백화점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남대문 인근의 코스모스 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입점을 요청했다. 원하는 곳을 고르면 그렇게 해주겠다는 등 파격적인 입점 조건을 내걸었다. 입점 후 제품이 잘 팔리자 다른 백회점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고후나비는 서울 시내 전 백화점에 입점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70년대 겉옷도 제대로 입지 못할 당시였지만 고후나비가 내놓은 잠옷은 날개 돋힌듯 팔렸다. 팬티나 러닝셔츠 등 속옷도 “고후나비가 만들면 다를 것”이라는 소비자들이 요청에 따라 만들게 됐다. 지금 고후나비 의 잠옷과 속옷 매출 비중이 서로 비슷해진 이유다. 온 가족이 한가지 디자인으로 입을수 있도록 만든 패밀리 룩 잠옷 역시 고객의 아이디어다. 홈드레스와 유아복 시장 진출도 고객과의 소통에서 비롯됐다. 최근엔 한 고객이 옷을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편지와 함께 고후나비의 디자인실로 한과를 보냈다.
그럼 고객들은 왜 고후나비의 옷에 열광할까. 한 발 앞서 디자인을 개발하고 봉제 라인과 바느질이 꼼꼼하다. 얼핏 보면 같은 옷 처럼 보이지만 입어보고 빨래해보면 다르다고 소비자들이 판단한다고 한다.속옷 안쪽의 작은 솔기라도 수면을 방해할까 봐 정성을 들여 ‘손끝 봉제’를 한다. 고명숙 창업주는 외화를 보면서 디자인 영감을 얻었다고한다. 시간이 나면 외국명화를 즐기면서 영화에 나온 배우들이 입은 옷을 눈여겨 봤고 이를 옷 디자인에 접목했다. 그렇게 명성을 쌓을 무렵인 1985년 고 창업주는 뜻밖의 결심을 한다. 백화점에 있던 매장을 모두 철수했다. 다른 업체들은 백화점에 매장을 내려고 기를 쓸 당시다.
이에 대해 이성환 대표는 “어머님은 시아버지의 회사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일종의 부도 트라우마(심리적 불안)을 갖고 있었던 것같다”며 “잘 나갈 때 안정적인 경영을 하겠다는 의지로 우리는 해석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회고했다.
잠옷을 입는 가정이 늘면서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잠옷이 쏟아지자 외형에선 고후나비를 앞서는 업체가 나왔지만 고 창업주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집에서 손으로 만드는 옷’이라는 초심으로 돌아가 ‘홈메이드 제품’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았다고 이 대표는 덧붙였다. 또 고 창업주는 백화점의 거래 관행을 낯설어했다고 한다. 어음거래를 못마땅해 했다.
고후나비가 백화점에서 철수하자 백화점의 잠옷 고객들은 할 수 없이 남대문 시장에 있는 고후나비 매장에 들러야 했다고 한다. 고후나비가 대기업과의 제휴를 뿌리치면서도 탄탄하게 경영을 할 수 있는 배경에는 국내외에 ‘고후나비의 충성고객’이 많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70년, 80년대에 이민 갔던 사람들 중에는 고국에 들렀다가 ‘고후나비 잠옷’을 사고 가는 사람들이 적잖다. 어릴 적 입었던 고후나비의 옷을 자신의 자녀나 손주들에게 대를 이어 입히기 위해서이다. 최근에는 중국의 보따리상이 고후나비를 많이 찾는다. 중국에는 이미 고후나비의 짝퉁이 나올 정도로 중국내 중산층이상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고후나비는 잠옷과 속옷,아동복 분야에선 ‘히든 챔피언’이다. 일부 대형 의류업체들이 고후나비의 디자인을 벤치마킹하면서 ‘고후나비처럼 만들라’고 생산라인에 주문한다고 한다. 실제로 고후나비가 디자인 인력을 보충하기위해 구인 광고를 냈는데 한 응모자가 들고 온 컬렉션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다른 업체에서 일할 때 손님으로 가장해 고후나비의 옷들을 사모아 디자인을 익혔다는 것이다. 그렇게 고후나비는 ‘잠옷의 교과서’자리를 잡았다. 다품종 소량판매의 힘은 한 땀 한 땀의 바느질과 좋은 옷감에서 나왔다.
창립 50주년을 꼭 1년 남겨두고 고후나비는 제2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 전초작업으로 지난해 10월 48년동안 써왔던 ‘고훈아’의 브랜드를 ‘고후나비’로 바꾸면서 브랜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또 ‘잠옷에 수면과학을 입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에 대한 투자도 늘리고 있다.
고후나비의 디자인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창업주의 며느리인 민현기 감사는 “제품의 가치에 감성을 더한 마케팅과 디자인의 혁신으로 또 다른 ‘고후나비의 50년’을 준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살갗에 닿는 잠옷과 속옷에 '창업주의 장인정신'을 스며들게 하는 일이라고 민 감사는 덧붙였다.
인터넷쇼핑몰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재구축할 것이라는 민 감사는 “내년 창립 50주년 행사 때 창립일을 세계수면의 날에 맞춰 선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세계수면학회는 수면의 중요성을 널리 홍보하기 위해 ‘세계 수면의 날(World Sleep Day)’을 지정했고 우리나라는 매년 3월 셋째 주 금요일을 ‘세계 수면의 날’로 정해 이날에 병원 등이 수면에 관한 강연이나 행사를 하고 있다.
이성환 대표는 “단추 하나 고르는 것과 단추의 위치, 또 실밥 처리 하나 하나에 고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자하는 것이 고후나비의 장인정신이고 이런 자세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경영가치’이자 ‘유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이을 후대 경영인도 이를 따르도록 법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