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지압장군과 박항서의 '승리방정식'은 뭘까

프랑스,미국,중국 등 대국 물리친 지압의 인내전술에 히딩크훈련 접목해 베트남 축구 깨웠다

2018-12-17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지압장군은

베트남에서 성공 드라마를 쓰고 있는 박항서 감독은 축구대표 선수들에게 ‘베트남 정신’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 정신은 한마디로 ‘불굴의 의지’가 쌓은 ‘승리의 역사’일 것이다.이렇다 할 무기가 없었던 베트남이 어떻게 해서 프랑스,미국,중국 등 대국을 잇따라 물리쳐 오늘날의 자주독립 국가를 일궜을까.

그 중심에는 베트남 국민들이 국부 호치민과 더불어 존경하는 지압 장군이 있다. 1970년대 미국 언론이 '20세기 최고 명장'으로 꼽았던 지압 장군은 그러나 군인이 아니었다. 하노이 대학을 졸업한후 교편을 잡다가 조국의 어두운 현실을 접하고 1930년 공산당에 가입해 항일 게릴라 전투를 이끌었다. 그 때 호치민을 만나 조국의 독립과 통일전쟁에 일생을 바쳤다. 먼저 2차 대전 종전 후 베트남을 계속 식민지로 두고자 했던 프랑스 군을 내몰았다. 1953년 3월 북부 국경 도시 디멘비멘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프랑스군은 3000여명이 죽고 1만2000명이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전력과 장비가 베트남군보다 뛰어났지만 지압 장군의 용병술과 허를 찌르는 전략에 두 손을 들었다. 이후 베트남이 두 동강으로 갈라지자 지압 장군은 남쪽 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군을 몰아내는 승부수를 둔다. 1966년 음력설에 맞춰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른바 구정 대공세다. 미국 국민들은 미 대사관이 일시 점령을 당하는 장면을 TV에서 목격했고 그 후 미국내에선 반전 여론이 들불처럼 번졌다. 이후 9년만에 미군은 베트남에서 완전히 떠났고 마침내 베트남은 하나로 통일됐다. 1979년 초 중국과의 국경분쟁에서 10만여명을 동원한 중국의 코도 납작하게 만들었다. 중국군은 3만여 명의 전사자를 뒤로하고 철군해야했다.

지압장군의 승리의 비결은 뭘까, 그는 "나는 세 가지를 하지 않았다. 적들이 원하는 시간, 싸우고 싶어 하는 장소, 그들이 예상한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통을 감내하고 전략적인 인내가 없이는 실행하기 힘든 전략이다. 한마디로 적이 약점을 드러낼 때까지 갖은 희생을 감내하는 고도의 심리전이다.박항서 감독은 패배에 익숙했던 축구대표팀을 아마도 이런 ‘지압정신’으로 무장시키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박 감독은 히딩크를 벤치마킹했다. 베트남 선수들의 개인기술은 낮은 편이 아닌데도 후반전에 체력이 떨어져 다 이긴 게임도 내주는 약점을 간파했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나라에 왔지만 유럽 전지 훈련에서 프랑스에게 5대0으로 대패하고 이어 체코에게마저 5대0으로 지자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다. 그후 5대0은 ‘히딩크 스코어’란 조롱도 받았다. 그래도 히딩크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술 훈련보다 체력훈력에 집중했다. 당장의 성적보다 목표(당시는 사상 첫 16강진출)를 달성하기위한 히딩크의 인내 전술이었다. 박항서는 히딩크 밑에서 코치 생활을 하며 이를 지켜봤다.

대표적인 히딩크의 체력훈련은 20m거리를 수없이 왕복하는 달리기다. 이른바 셔틀런이다. 그냥 보면 별 다른 훈련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선수들은 이런 왕복달리기를 100회 이상 하면 녹초가 됐다. 이천수 등 당시 젊은 선수들 조차 '공포의 삑삑이'라고 부르며 혀를 내둘렀다. 유럽선수들은 보통 120회 달리는데 우리나라에 몇몇 선수들은 140회까지 했다고 한다. 체력이 올라오자 성적이 뒤 따라왔다. 2002년 한일월드컵때 이탈리아(16강전)와 스페인(8강전)과 맞붙어 연거푸 연장 승부끝에 승리를 거뒀다. 지압정신과 히딩크의 체력전술을 접목한 박항서 감독은 선수평가를 냉정히 했다. 현지의 지연과 학연이 없는 ‘외국인 감독’ 박항서는 ‘이기는 팀’을 꾸릴 수 있었다. 그 다음 선수위에 군림하지 않는 리더십을 보여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원팀’으로 만들었다. 박항서의 승리 방정식을 만든 것이다. 베트남 축구의 잠재력을 극대화했다.

이 처럼 리더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조직의 성과는 얼마든지 달라질수 있다. 자원과 기술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세계 10대경제국으로 올라선 것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정신운동에 힘입은 결과였다.

박 감독은 ‘동남아 월드컵’으로 불리는 스즈키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후 보너스로 받은 1억원을 베트남 축구 기금을 내놓았다. 그는 “나는 영웅도 아니고 평범한 지도자다. 축구인으로서 한-베트남 간 우호 증진에 일조한 것이 영광”이라며 “공로는 선수들의 몫”이라며 몸을 낮췄다.

전쟁영웅 지압장군도 은퇴한 뒤 낙향했다. 국가에서 주는 승용차도 마다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시골노인으로 살다가 2013년에 10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