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유일한 창업주"설탕물은 못 팔겠다"

오늘 창업 92주년 … 경영과 독립운동,교육에 헌신한 '기업가 정신의 사표'그립다

2018-12-10     김승희 이코노텔링기자
류일한

우리는 이런 기업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이런 존경받는 기업인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는 기업가이면서도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자신을 교육자라 불러주기를 더 원했다. 실제로 그는 교육자(educator)라고 쓰여진 명함을 따로 갖고 다녔다.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뭔지를 온 몸으로 보여준 시대의 스승이었다. 어떤 거인이 이런 인생의 금자탑을 쌓을 수 있을까. 사익보단 공익을 앞세웠고 스스로 늘 낮췄던 기업인의 사표(師表)이다. 바로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柳一韓·1895년~1971년) 창업주의 인생이다. 그가 가는 길은 곧 역사가 됐다.

유한양행은 오늘로(12월10일) 꼭 창립 92년을 맞는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7년 9개월이 됐다. 하지만 그의 족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보석 같은 역사가 되고 우리가 아무리 우러러도 오히려 모자랄 만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 아버지에 그 아이들이었다. 유 창업주의 아버지는 구한말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평양에서 미싱 대리점과 비단장사로 꽤 수완을 발휘해 돈이 모이자 아들 셋을 모두 유학을 보낸다.

유일한은

자신 역시 9살에 부모님을 잃어 홀로 자수성가한 만큼 아들들에게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라는 뜻이었다.

장남인 유 창업주는 1904년 10살 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생활비와 학비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벌어야 했다. 미국 중부 네브라스카주 작은 농가에서 스쿨보이(집안일을 거들어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는 하숙생)가 됐다. 고등학교 때는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미식축구선수로도 이름을 날려 장학금도 받았다. 미시간대학교 상과를 다니면서 학생신분으로 중국산 비단을 내다 파는등 장사수완을 발휘했다.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근무하는 유일한 동양인이 됐다. 하지만 그는 샐러리맨 생활에 안주하지 않았다. 중국인을 상대로 한 숙주나물 공급사업을 펴 꽤 큰 돈을 벌었다. '라초이'란 식품회사를 만들었고 이어서 무역회사를 설립해 종업원 전원을 미국에 있는 한국인으로 고용했다.

어느 정도 사업이 자리를 잡자 그는 21년만인 1925년에 귀국길에 오른다. 평양에서의 사업을 정리하고 북간도로 이주해 있던 부모를 만난 뒤 고국에 들렀다. 아버지 유가연은 임시정부에 거금을 쾌척하고 이상설과 이동녕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명동서숙의 재무 일을 보면서 북간도에 머물고 있었다.

국내에서 국민들이 전염병과 기생충, 결핵에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유 창업주는 이듬해인 1926년 12월10일 드디어 유한양행의 문을 열었다.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수 있다고 믿었다. 독립운동가이자 독립신문을 창간해 민중계몽에 앞장섰던 서재필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서재필은 유 창업주에게 “한국인임을 잊지 말라”며 그의 성인 유(버느나무 柳)를 연상시키는 버드나무 목각화 한 점을 선물했다. '버드나무처럼 민족이 편히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라'는 의미였다.

지금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마크가 탄생한 배경이다. 양행(洋行)은 당시 서양 수입품을 취급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상점을 일컫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가져온 약품을 판매하며 사업의 방향을 저울질했다.

의약품과 위생용품을 수입 판매하는 한편 돗자리와 도자기 등 국내 특산물 수출에도 앞장서 농가소득 증진에도 일조했다. 1933년 독자 개발했고 현재도 인기가 있는 '안티프라민'은 유한양행의 효자 의약품이 됐다. 1939년 부천 소사에 국내 첫 약품제조 공장을 만들어 의약품 국산화의 시동을 걸었다. 기업 수익기반이 탄탄해지자 유 창업주는 의약업계 처음으로 1936년 주식회사로 회사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리곤 회사주식의 52%를 종업원들에게 나눠줬다. 사상 처음으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천했다. 1960년에는 의약품 실험실도 가동했다. 신약 개발의 요람을 만든 것이다. 곧이어 경성방직에 이어 두 번째로 기업을 공개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숨 가쁘게 창업과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던 그의 행적 중 ‘8년의 국내 공백’ 기간이 있었다. 1938년 고려인삼과 나전칠기의 해외시장 개척을 한다면서 출국한 그는 1946년 7월에야 귀국한다.

사업체는 동생 유명한에게 맡기고 미국에 머물며 조국의 독립활동을 지원하고 공부를 더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립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중계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회사를 운영중이던 동생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비행기를 헌납하고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는 광고를 신문에 냈다. 이 소식을 들은 유 창업주는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동생이라고 그렇게 하고 싶었겠는가. 1946년 유일한 창업주는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에 취임하게 되자 회사를 떠났다. 공익을 위한 자리에 앉은 만큼 사익을 멀리했다.

그는 국내에서 손을 댄 사업마다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 크라이슬러 자동차 대리점을 차렸지만 곧 문을 닫았다. 화장품 사업을 하려고 할 때는 정부가 허가를 내주는 조건으로 정치자금을 요구하자 미련 없이 포기했다. 치약제조 사업에선 쓴 맛을 봤다

교육자로

“나는 회장이 아니라 교육가다”

유 창업주는 사업을 하면서 늘 국내 교육환경을 걱정했다. 돈이 없어 배움의 길을 포기하는 청소년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1952년 소사공장에 교실을 마련했다. 학비와 숙식비는 무료였다. 그리고 10년뒤에 유한학원을 설립해 한국고등기술학교의 문을 였었다. 입학생 전원(56명)에게 장학금을 줬다. 이 학교가 나중에 유한공고로 바뀌었고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언제나 학비 걱정을 안했다. 또 대학에 진학해 일정한 학점만 받으면 장학금을 줘 학업에 전념하도록 도왔다. 유일한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유한양행은 사회의 것이며 나아가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그것을 잠시 관리하는 임무만 띠고 세상에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허튼 생각을 멀리했다. 1960년대 드링크 제품이 날개 돋힌듯 팔리자 드링크 음료 사업에 진출하자는 건의를 받고 진노한다. "한강 물에 설탕 넣어 팔자는 것이오, 국민의 건강을 지키겠다는 제약업체가 국민의 건강을 좀 먹어가면서 돈이나 뜯어내자는 것은 강도보다도 더 나쁜 것이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의 몫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그의 믿음은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언장에 그대로 녹아있다. 장남 유일선에게는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가거라”. 다만 그의 딸(손녀)의 학자금으로 1만달러를 남겨 준다. 그리곤 자신의 보유주식 전량을 사회에 내놓았다.

그의 삶은 언제나 검소했다. 미국산 쉐퍼 만년필을 19년동안 쓰다가 못쓰게 되자 국제우편으로 미국으로 보냈다. 쉐퍼 본사는 오래 사용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 새 만년필을 보내왔다. 1971년 3월 77세 나이로 영면 하기 한 달여전 유한공고 졸업식에 참석했다. 사람을 귀하게 여겨 가르치는 일이 가장 기분 좋은 일이라던 그의 마지막 발자취는 그렇게 학교에 남았다.

그가 타계하자 정부는 기업인에겐 극히 드물게 국가 최고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독립운동 활동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을 하나 더 수여했다. 평생을 가정보다는 기업, 기업보다는 교육에 열정을 쏟았던 그가 신사 같은 상인이라는 뜻인 ‘신상’(神商)으로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의 딸 유재라 역시 사재 200억원 모두를 유한재단에 기증하고 세상과 이별했다. 그러니까 지금 창업주 가족 누구도 지금은 유한양행의 주식 한 주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거인이 남긴 기업가 정신은 우리 가슴에 언제나 살아있다. 수천억원, 아니 수조원의 이익을 남기는 기업은 많아졌지만 유 창업주 만큼 조국과 국민을 사랑한 기업인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유일한 창업주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