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을 만든 사람들㉖캘빈클라인㊦호텔방의 기적

친구에게서 1만달러 빌려 회사 차려 … 호텔 객실에 쇼룸을 만든 역발상 엘리베이터 잘못 내린 백화점 구매담당과 마주쳐 5만달러어치 코트 납품 인기 배우, 브룩 쉴즈를 모델로 기용하고 선정적 광고로 브랜드가치 상승 청바지 앞세워 사업다변화…커진 회사 감당안되자 매각해 여유있는노년

2019-12-21     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캘빈은 1968년 할렘의 오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가 된 배리 슈워츠한데 1천만원을 빌려 자신의 회사(Calvin Klein, Ltd.)를 차린다.  의류디자인에 대한 열정과 뚝심이 빚어낸 승부수였다.

2003년

1968년 3월, 그는 뉴욕 7번가의 작은 호텔 방 하나를 빌려 쇼 룸을 열었다. 바로 여기에서 훗날 전설이 되는 드라마 같은 사건이 일어난다.

뉴욕시내 대형 백화점의 물품 구매 담당자가 실수로 엘리베이터 층을 잘못 내리는 바람에 캘빈 클라인의 쇼 룸으로 들어가게 됐고 그가 제작한 코트들을 우연히 본다.

그는 한번에 클라인의 옷에 매료된다. 그리곤 당시 패션계의 막강한 실력자였던 밀드레드 커스틴(Mildred Custin) 사장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미팅을 주선한다.

그 후 미팅자리에서 5만 달러나 되는 어마어마한 주문을 받는다. 마치 영화이야기 같은 성공 스토리이다. 이를 계기로 그의 쇼 룸에는 바이어들이 몰려든다. 백화점 물품구매 담당자인 본위트 텔러(Bonwit Teller)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쇼윈도에 그의 컬렉션이 전시되고 뉴욕 타임즈에 광고까지 실었다.

불과 20대의 젊은 나이에 캘빈 클라인은 사업 기반을 다지고 미국 패션을 이끄는 디자이너로 도약할 힘을 얻는다. 단돈 1만달러를 빌려 시작한 회사가 10년만에 연 매출 1억 달러를 올리는 대형 메이저 디자이너 업체가 됐다.

인생 성공 요소중에 우선 기본적으로 선천적인 탤런트도 중요하지만 천금같은 '행운의 기회'가 있어야 하다는 말콤 브래드웰의 이야기처럼, 기회는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가는 모양이다. 뭐니뭐니 해도 그를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도약시킨 것은 1978년부터 시작한 청바지 사업의 성공이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배우, 브룩 쉴즈를 모델로 기용한 캘빈 클라인의 전략적인 광고가 빅히트를 친다. 기존 디자이너 브랜드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캐릭터를 강조한 진(Jean)이 소비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캘빈 클라인의 진 패션은 단번에 유행을 쫓는 세대들의 필수 아이템이 되버렸다. 이후 1982년 남성 사각 팬츠의 앞 중심 고무 허리 밴드에다 브랜드 이름을 새겨 넣은 CK 언더웨어 라인 또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날개돋친듯 팔린다.

캘빈

1980년대 후반, 청바지와 속옷에 이어, 향수, 액세서리, 언더웨어, 시계 등 다양한 상품 영역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하는 것 마다 사업이 잘됐다. 흑백의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광고사진은 패션계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지만 브랜드 가치를 올리는데 도움이 됐다.

1970, 80년대를 거치며 그의 패션 제국은 승승장구 한다. 1990년대 들어 그의 패션은 심플하고 모던한 뉴욕 스타일로 점차 완성 단계에 이른다.

1995년부터 패션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미국 패션 디자이너 협회(CFDA) 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다. 달이 차면 기울듯, 기업 경영도 한 세대를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의 패션 왕국도 저물어 갔다.

1974년 첫 번째 이혼 후 뉴욕 셀레브리티들의 쾌락주의적인 밤 문화에 빠졌다.그로인해 그의 라이프스타일 놓고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받기도 한다.

전통적인 상류층의 좋은 취향을 따르고자 한 랄프 로렌과 달리, 그는 도덕과 관습을 벗어나는 일탈을 곧 잘 즐긴다. 이것은 분명 그의 패션제국의 이미지에 도움이 안됐다.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이혼을 했다. 그 이후 다시 결혼했던 소식은 아직 없다. 한때 딸이 유괴되어 10만 달러를 주고 풀려나는 사건도 경험한다. 신경쇠약증에 걸려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기도 한다. 심한 간염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으며, 외모를 유지하고자 실리콘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기도 한다.

2002년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 무대에 오른 이후, 그는 자신이 세운 패션 제국에서 물러난다. 캘빈 클라인은 다가올 시대의 취향을 앞서 리드해 간 디자이너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라이선스 사업과 글로벌 비즈니스로 엄청나게 확대된 패션 제국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1990년대 말 회사경영 전반에 걸쳐 구멍이 숭숭난다. 결국 그는 회사전체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캘빈 클라인 진을 제조ㆍ판매하는 와나코(Warnaco) 그룹과 캘빈 클라인사 간에 법적 공방이 발생한다. 캘빈 클라인사는 자사 브랜드의 신제품 청바지를 할인점에 저가로 공급해 브랜드 이미지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고, 양자 사이의 격렬한 소송전은 언론에서 생중계 되듯 노출된다. 캘빈 클라인은 명성에 큰 타격을 입는다.

2003년 캘빈 클라인과 배리 슈워츠는 필립스 반 호이젠(Phillips-Van-Heusen)에 회사를 팔아 자신이 세운 패션 제국의 수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당시 매각가는 현금만 4억 달러다. 2003년 뉴욕 동쪽의 긴 섬, 롱 아일랜드의 끝 쪽 사우스햄턴 지역에 유리와 시멘트로 된 멋진 집을 지었다. 1만평이 넘는 넓은 대지 위에 해안가 전경이 그림같은 곳이다.

약 800억원을 들여 건축했다. 얼마전 그 소식이 뉴욕 타임즈 기사에 실렸다.70대 후반의 홀가분한 노인으로 그렇게 황혼기를 즐기고 있다고 미디어들은 전하고 있다.<캘빈 클라인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