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 '좋은 황젯감', 그러나 나쁜 황제
갈바는 자살한 네로에 이어 원로원의 추대로 황위에 오른 만큼 '신망'은 있었던 셈 민심 읽지 못하고,측근은 무능하고 부패해 근위대 반란으로 즉위 8개월 만에 피살 용감하게 최후 맞이 했다지만 결국 어리석을 정도의 인색과 무능,부패만 도드라져
"그는 신하가 되기에는 너무 위대한 듯 보이며, 만일 최고의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최고의 권력을 누렸을 인물이라는 데 모든 사람이 동의했을 것이다."
이건 로마제국의 6대 황제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에 대한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의 평이다. 『로마 황제』(크리스 스카레 지음, 갑인공방)의 갈바 편 말미에 나온다. 어떤 생각이 드는지? 혹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란 소신 발언 덕에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어떤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가.
갈바는 네로 황제의 뒤를 이었지만 그의 친아들도 양자도 아니었다. 오로지 원로원의 추대로 황위에 올랐다. 그러니 제법 신망이 있었던 셈이다. 명문 귀족 출신으로 법학을 공부해 젊은 나이에 법무관이 되어 능력을 인정받았고, 프랑스 남부 아퀴타니아 지방의 총독이자 집정관으로 게르만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군사령관이기도 했다. 그러니 시민의 신망이 두터울 만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3대 황제 칼리굴라가 살해되었을 때 사람들이 갈바에게 황제로 즉위하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신중한 갈바는 몸을 낮췄으며 이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총애를 받는 계기가 됐다. 이후 아프리카 총독으로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네로 등극 이후에는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이베리아반도에 칩거했다.
에스파냐에 있는 속주를 8년간 관리했는데 엄격한 법집행으로 속주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당시 지방 관리들이 제멋대로 약탈행위를 했는데 이를 규제해 질서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환전 사기꾼을 체포하여 양손을 환전대에 못 박게 하고는 손을 잘라버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은인자중하던 갈바는 68년 네로 황제가 자살하자 원로원의 결정에 따라 황제가 되어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미 그때 갈바는 두루마리 책도 들지 못할 만큼 중풍이 악화된 73세의 노인이었다. 게다가 황제 갈바는 민심을 읽지 못하고, 측근은 무능하고 부패했기에 그의 치세는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갈바는 군사들에게 관습적으로 주던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여기에 일반 병사든 장교든 함부로 대해 군심(軍心)을 잃었다. 또 사기꾼이자 네로의 오른팔이었던 티겔리누스를 처형하길 원하는 시민들의 희망을 외면했다. 게다가 갈바를 추대한 인물들이 한 자리씩 차지했는데 이들의 무능과 부패는 원로원과 군대의 원성을 샀다.
그의 최측근인 티투스 비니우스, 코르넬리우스 라코, 해방노예 이켈루스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특히 갈바의 동성 애인 이켈루스는 네로의 해방노예들이 13년간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재물을 챙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가 이끄는 근위대의 반란으로, 갈바는 즉위 8개월 만에 살해당했다. 그나마 볼 만한 것이라고는, 갈바가 "이것이 로마 백성들을 위해 더 옳은 일이라면 어서 목을 베라"며 반란군의 칼 앞에 스스로 목을 내밀었다는 일화다.
하지만 누구와는 달리 용감하게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이 갈바의 비극을 미화하지는 못한다. 어리석을 정도의 인색함과 무능, 부패가 도드라질 뿐이다. 설사 "그가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좋은 황제 재목으로 생각했을 것"이라는 타키투스의 평가가 옳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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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