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훈의 세상만사] ㉘ 화장실 이야기(1) 세계 10억 명은 강이나 들판서 '생리활동'

빅토르 위고가"인류의 역사는 화장실의 역사"라고 했듯이 화장실은 인류와 밀접 기원전2500년 무렵부터 화장실 등장…고대 로마는 공용 화장실 150개이상 운용 오늘날 달나라를 오가는 문명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혜택 못받아 'WTD' 만들어져

2025-12-18     이코노텔링 이만훈 편집위원

'세계 화장실의 날(WTD: World Toilet Day)'을 아시나요?

이 날은 유엔이 세계 위생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행동을 고취하기 위해 2013년부터 11월 19일을 공식 지정한 국제 기념일이다.

인간이 생리 현상인 똥과 오줌의 배출을 처리하는 화장실의 역사는 아주 오래됐다.

소설 《레미제라블》(1862)의 저자인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1802~85)가 "인류의 역사는 화장실의 역사"라고 했듯이 화장실은 인류와 밀접한 시설이다.

기원전 2500년 무렵으로 추정되는 고대 인도의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였던 '모헨조다로(Mohenjo Daro)'에는 벽돌 등을 이용해 만든 화장실이 있었고, 고대 로마에도 '포리카이(Foricae)'라는 공용 화장실이 150개 이상 설치돼 운용됐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불국사와 익산 왕궁 터에 흔적이 남아 있다.

이렇게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화장실이 누구에게나 당연한 시설로 여겨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달나라를 오가는 문명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수십억 명이나 있고, 이것이 바로 WTD의 존재 이유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36억 명의 사람들이 건강을 해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질 나쁜 화장실과 함께 살고 있다. 3명 중 1명 이상이 화장실이 없는 삶 속에 있는 것이다.

그 중 약 10억 명은 강, 개울, 들판, 해변 등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세계아동기구(UNICHEF)는 남아시아에 9억 5300만 명, 사하라 사막 이남에 6억 9500만 명, 동부 아시아에 3억 3700만 명, 남동부 아시아에 1억 7600만 명, 중남미에 1억 600만 명, 그 외 지역에 9800만 명이 화장실이 없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한다.

이런 열악한 환경은 단순히 불편함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강과 호수, 토양을 더럽히고 결국은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인류의 건강을 위협한다. 세계적으로 최소 20억 명의 사람들이 인간의 배설물로 오염된 식수원을 사용하며 이로 인해 매일 800명 이상의 다섯 살 미만의 어린이가 설사병으로 죽어간다고 WHO는 경고(2019년)한다. 제대로 된 화장실을 갖춘다는 건 지하수와 토양 같은 천연자원을 보호하고 사람들의 건강 분만 아니라 배변 문제에 관한 안전과 존엄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토는 서울에 처음 부임했을 때 똥냄새에 질겁했다. 어른과 아이들이 길바닥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누었고, 집집에서 아침마다 요강을 길바닥에 쏟았다. 장마 때는 변소가 넘쳐서 똥 덩어리가 떠다녔다. 똥냄새는 마을 골목마다 깊이 배어 있었고 남대문 거리, 정동 거리에도 똥 무더기가 널려 있었다. 통감부 직원들이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똥을 밟고 미끄러졌다는 얘기를 이토는 요정에서 술 마시다가 기생들한테서 들었다.'

-김훈의 《하얼빈》에서

똥·오줌으로 인한 위생 문제라면 사실 100여 년 전 서울(漢陽)도 이들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구는 많고, 오물 처리는 제대로 안 되니…. 한마디로 거리거리가 오물 더미와 악취로 넘치는 '분토(糞土)'였다. 한양이 본격적으로 대도시로 성장한 17~18세기에는 인구가 20만 명이나 돼 사람은 많은데 그 사람들의 생활 쓰레기를 감당할 역량이 부족해 거리 여기저기에 똥, 오줌이 굴러다녔다. 농촌에서는 똥이 비료로 잘 쓰였지만 도성의 여염집에서는 뒷간에서 나오는 분뇨를 비료로 쓸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뒷간이 가득 차면 그냥 퍼다 집 근처 하천이나 한강변에 무단으로 투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마로 하천이 범람이라도 하면 한양 거리거리가 똥물로 뒤덮이기 일쑤였다.

실학자 박제가(朴齊家)는《북학의(北學議)》에 "성 안에서 나오는 똥과 오줌을 다 수거하지 못 해 더러운 냄새가 길에 가득하며, 냇가 다리 옆 석축에는 사람 똥이 덕지덕지 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기지 않는다. 개똥과 말똥이 사람의 발에 항상 밟힐 지경(…중략) 재는 모두 길에다 버려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눈을 뜰 수 없고, 이리저리 날려서 많은 집의 술과 밥을 더럽히지만 사람들은 불결함을 탓할 뿐, 실은 함부로 버린 재에서 생기는 것인 줄 모른다."고 적었다. 영국의 여행가이자 화가로 1890년대 중국과 조선을 여행한 새비지-랜도어(Savage-Landor)도 1895년 런던에서 펴낸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orea, Land of Morning Calm)》에 이르길 "서울에 도착하니, 여름에는 비 덕택에 오물이 씻겨 내려가 지낼 만하고, 겨울이면 얼어붙어서 괜찮지만, 봄만 되면 얼었던 오물이 풀리면서 풍기는 냄새가 장난이 아니라 차라리 코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라고 했다.

또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으로 조선을 두 차례 방문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만나기도 했던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shop)여사는 그의 저서《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조선인들에게 한양만이 살아갈만한 삶의 가치가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면서도 "서울의 골목길 도랑에는 초록색 점액질의 걸쭉한 오물이 고여 있고 곳곳의 물웅덩이에선 지독한 냄새가 났다. 나는 중국 북경을 보기 전까지는 서울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가 아닌가 생각했고, 소흥(紹興)을 보기 전까지 서울을 가장 냄새나는 도시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개천은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고 하층 계급 여인들은 악취 나는 물에서 옷을 빨고 있었다." "악취 나는 하수도는 반나체의 어린 애들과 피부병 걸린 채 눈이 반쯤 감긴 큰 개들의 놀이터였다."고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개화파 지식인 김옥균(金玉均·1851~1894)은 일본에 다녀온 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 1884년 7월 3일 자에 이렇게 썼다.

"내가 들으니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에 왔다가 가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 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한다 하니, 어찌 차마 들을 수 있는 말인가…."

개화파 김옥균이 가장 먼저 했던 일도 똥·오줌(糞便) 처리이다. 거리의 위생을 다스린다 하여 이름 붙은 '치도국(治道局)'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도성에서 분뇨를 내다버리는 사람들을 몽땅 처벌하거나 감옥에 가두고 분뇨 처리 시설을 개혁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사람들의 똥오줌 처리도 골치 아픈데 소(牛)까지 속을 썩였다. 당시에는 철도와 자전거가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마차가 화물운송 역할을 했었는데, 우마차의 소들이 싸는 똥까지 트집을 잡아 잡아가는 바람에 원성이 극심했다. 그가 주도해 1884년 12월 4일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면서 개화파가 모조리 축출되는 바람에 치도국은 개관 3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또 대한제국(大韓帝國)때 순종(純宗)의 결혼식 날 서울 시민들이 구경하러 덕수궁 앞에 몰려들었는데 사람들이 서로 밀치고 당기면서 도랑에 빠진 사람은 신발과 아랫도리가 똥물에 흠뻑 적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이를 보면 처리되지 못한 분뇨가 개천을 통해 한강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에 건설된 수로는 한양 북쪽과 남쪽의 물길이 도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에 합류하는 형태였다. (*서울 남대문로 아래에는 이때 만든 수로의 일부가 30m가량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화강암으로 견고하고 튼튼하게 만든 덕분에 지금도 서울 시민의 하수관로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한양은 사방이 산과 능선으로 둘러싸여 장마철이면 홍수피해가 막심했다. 태종(太宗) 12년(1412) 완공한 1차 개천 공사도 2년 전 5월, 7월 ,8월 세 차례에 걸쳐 큰 홍수로 배수로가 막히는 등 큰 피해를 입은 뒤 취한 조치였다. 이 공사는 수도 한양을 관통하는 배수 시설의 대간선을 새로 축조하다시피 한 대역사로 이후 지방의 개천 정비 사업의 모범 사례가 됐다. 현재도 청계천은 서울의 중심적 우수 배수 시설로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1차 개천 공사로 한양의 간선 배수 시설은 갖추어졌으나, 지류와 세천(細川)은 자연 상태 그대로여서 장마철이 되면 지류와 세천이 넘쳤고, 청계천에 모인 큰물은 성곽의 좁은 수로를 빠져나가지 못해 도성 안은 늘 물바다가 되곤 했다.

여기에다 많은 인구도 문제였다. 세종(世宗) 10년(1428년)의 한양 인구는 10만 명으로 똥·오줌의 하루 발생량은 130kl, 1년 발생량은 4만7450kl로 추산된다. 교통이나 운반수단, 기술 등이 현재와는 전혀 다른 당시에 이런 많은 양의 분뇨를 처리·처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며, 이런 문제가 계속 누적되면서 《북학의》의 지적이 나온 것이다. 조선 후기 변소의 구조로 기록에 "인민의 집 담 구멍으로 똥오줌을 흘려보냈다"라는 것을 보면, 농사에 똥오줌을 사용하지 않았던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집 밖으로 구멍을 뚫어 생활오수와 똥오줌 같은 오물을 흘려보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개천에 모인 똥오줌, 재 등은 하천의 바닥을 높이고, 적은 강우로도 범람이 잦았을 것이다. 궁궐의 하수구를 '오간수문(五間水門)'이라 했으며, 큰물이 지면 이 오간수문으로 개천물이 궐내로 역류했다.

이런 똥·오줌·재의 문제가 조선 초기부터 수백 년 이어지면서 오수와 똥·오줌의 배출구로서 활용해 오던 개천(淸溪川)의 사정은 절정에 이르렀고, 영조(英祖)는 재위 36년인 1760년 "아, 도성 안에 백성이 너무 많다"며 장탄식한 끝에 드디어 2개월간의 개천 준설공사를 실시하게 됐다. 준설공사가 끝나고 영조는 준천사(濬川司)라는 관청을 신설해 개천의 준설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그 후 1773년 개천의 다리 보수공사와 제방 강화공사를 실시했다. 한양 인구는 조선 초기 10만에서 계속 늘어 2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는데 이에 따라 순조(純祖) 33년(1833)에 3개월간의 개천 준설공사를, 철종(哲宗) 7년(1856)에 개천 준설공사와 제방 공사를, 그 뒤 고종(高宗) 2년(1865년 3월)에 대규모의 개천 준설공사를 또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독립신문(獨立新聞)'은 1897년 9월 2일 자 논설에서 "서울 안에 있는 우물 백분지 구십 구분(九十九分)은 모두 지텬(지천)하고 쇽(속)으로 통하야 개텬(개천) 물이 틈으로 시며들어 가니 대개 지금 서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먹는 물이 대쇼변 거른 물 석긴 물을 먹는 것이라. 그 물 한 방울을 현미경 밑에 놓고 보거드면(볼 것 같으면) 그득한 것이 버러지한 생물인데, 그 생물에 대개 열 사람이면 아홉은 체증이 있다든지 설사를 한다든지 학질을 앓는다든지 무슨 병이 있든지…"라면서 불결한 환경을 개탄하고, 환경이 각종 질병의 근원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전염병 예방과 공중위생 향상을 목적으로 배수로 준설과 관리를 시작했다. 조선 시대까지 주로 빗물 배수 시설로 기능하던 개천이 중요한 위생 시설로 인식되면서 근대적 도시 하수도에 대한 개념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500년간 유지해온 한양의 수로는 100년 전인 1910년경, 근대적 지하 수로로 탈바꿈한다. 기존 조선의 물길에 근대적 토목과 건축 기술을 더한 근대 배수로가 서울 도심 전역에 놓였다.

#알려진 대로 프랑스의 베르사이유(Versaille) 궁(宮)과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에는 뒷간이 없었다. 베르사유 궁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화단에 몰래 들어가 볼일을 봤다. 이 때문에 똥오줌 냄새가 진동해 루이 14세는 죽기 전에 '1주일에 한 번은 화단에 있는 똥을 치울 것'을 법령으로 공포하기도 했다. 그는 소화불량으로 하루에 14번씩 용변을 봤는데 제리(jerry)라고 하는 요강단지를 사용했다. 베르사이유 궁뿐만 아니라 파리 등 유럽의 도시들에선 밤만 되면 요강을 창밖으로 쏟는 일이 빈번해 지나던 사람들이 똥오줌을 뒤집어쓰는 일이 많았다. 이 때문에 비가 오면 길거리가 똥물이 섞인 구정물이 드레스를 적셔 우산과 하이힐이 필수품이었다.

또한 자금성 역시 화장실은 없어도 배설물을 전문으로 처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배설물을 모아두고 성 밖으로 내보내는 업무를 수행했다. 자금성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화장실 대신에 배설을 하는 전문 도구를 사용했는데 변기, 요강, 의자 등 여러 가지가 있었고 신분의 등급에 따라 사용하는 기구도 달랐다. 이 중 황제가 사용하는 배설 도구가 '관방(官房)'으로 가장 고급이었다. 관방은 이동식 화장실과 같은 것으로 황제가 가는 곳마다 내시들이 관방을 들고 따라다녔다. 황제가 소변을 볼 때는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태인 '호자(虎子)'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관방과 호자는 모두 침전(寢殿)엔 두지 않고 내시가 각각 빈방에 보관해두고 있었는데, 황제가 필요할 때 제때에 대령하지 않으면 '기군지죄(欺君之罪)'로 다스렸다. 황제가 소변을 볼 때는 내시가 호자를 손으로 받쳐 들었다. 비빈(妃嬪)들이 사용하는 관방도 있었는데, 모양은 약간 달라 직사각형이나 타원형에 주로 나무와 도자기로 만들었다. 청나라 최고 권력자로 갖은 사치를 누린 서태후(西太后)도 화장실만큼은 따로 가질 수 없어서 은으로 된 관방을 썼는데 궁녀들은 흰 종이에 물을 뿌리고 인두로 다려 직접 화장지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경복궁의 사정은 어땠을까. 경복궁 역시 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내전이나 왕이 신하들과 공식적으로 만나는 외전, 그리고 왕실가족이 사는 주거 공간 등 궁궐의 중심부에는 없었다. 대신 왕은 '매우틀', 혹은 '매화틀'*이라는 전용 이동식 변기에서 용변을 해결했고 왕비와 왕실 가족들은 요강을 썼다. 최고 권력자의 똥이 톱 시크릿(Top Secret)인 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왕이 똥이 마려우면 배설 담당관**인 복이나인(僕伊內人)을 부르고, 그러면 장소가 어디든지 복이나인이 궁녀들을 대동하고 냉큼 달려와 왕의 주변에 휘장을 치고 안에 매화틀을 넣어준다. 매화틀은 고급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지존의 엉덩이가 닿는 부분을 비단 등으로 감싸 부드러운 느낌을 주도록 했다. 네모꼴로 가운데에 구멍이 뚫려 있어 볼일을 볼 수 있게 만들어졌다. 구멍 바로 아래에는 넣고 뺄 수 있는 똥받이 그릇이 있는데 미리 '매추'라는 여물을 깔아놓아 똥오줌이 튀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도록 배려했다. 매화틀에 담긴 매화는 왕의 측근 나인이 다시 매추로 덮은 뒤 즉시 내의원에 보내져 어의가 색깔과 냄새, 맛을 점검해 임금의 건강상태를 확인했다. 내의원에서 하는 일 가운데 날마다 왕의 건강을 체크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조선시대 왕의 주치의였던 어의(御醫)를 다른 말로 '상분직(嘗糞職)'***이라고 한 까닭이다. 매일 임금의 똥 맛을 보며 건강을 살피는 직책이라는 의미다. 어의는 왕의 똥 변화를 살핀 뒤 그 내용을 내시부 수장인 상선(尙膳)에게 알리고 왕의 수라를 만드는 사옹원(司饔院)에 수라상 요리 재료를 조절하도록 권유했다. 똥을 통해 건강 체크와 식단 관리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베르사이유나 자금성과 달리 경복궁에는 화장실도 있었다.《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경복궁에는 뒷간이 모두 28군데나 있었고, 규모를 모두 합치면 75.5간이나 됐다. 동궐에는 21군데, 36칸의 뒷간이 있었다. 대개 한 칸이었으나 7칸짜리도 있었다. 궁궐의 뒷간은 뚝 떨어진 별채로 짓거나 본채를 둘러싼 행각의 일부에 설치했다. 행각의 일부라 하더라도 본채에선 멀리 떨어진 곳, 행각의 출입문 가까이에 있어 될 수 있는 한 외부와 잘 통하는 곳에 배치했다.

2021년 7월 경복궁 동궁 권역에서 조선 시대 공중 화장실 유구(遺構)가 발굴돼 공개됐는데 물을 흘려보내 변을 발효시키는 정화조 구조의 공중 화장실로 한꺼번에 8~10 명 씩 하루 150명이 사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이런 현대식 정화조 유구가 우리나라에서 확인된 것은 처음이고 세계적으로도 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굴 팀은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화장실은 길이 10.4m, 너비 1.4m, 깊이 1.8m의 긴 직사각형 구덩이 형태인데 4∼5칸 규모로 한 칸엔 가림막을 중간에 두고 발판 2개를 놓아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 변기 앞에는 옷을 여밀 수 있는 별도 공간을 뒀고 지붕도 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화장실 유구는 물을 흘려보내는 정화조 구조로 정화조 내부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入水口) 1개와 물이 나가는 출수구(出水口) 2개를 갖추고 있다. 특히 발굴 유구 토양에서도 엄청난 기생충 알(g당 1만8000건)이 검출돼 이곳이 뒷간이었음을 보여줬다. 한편 영조 6년(1730)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영경문(永景門) 길가에 있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공중변소를 정비해야 한다는 기사가 있어 궁궐 주변 사람의 출입이 많은 곳에도 공중변소를 설치하여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 유럽에서도 왕의 똥을 치워주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최고 명문 중 명문이었다. 왕이 볼일을 본 후 뒤를 닦아주는 '청결관(Groom of the Stool)'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궁정인(宮庭人· gentleman of the bed chamber)가운데 으뜸 자리이다. 이는 루이(Luis) 14세 때 왕이 옷을 갈아입는 의식에서 건네주는 옷에 따라서 귀족의 격(格)이 달라졌는데 가장 높은 게 내복이었던 것과 비슷하다. 옷의 서열은 내복>팬티스타킹>상의=바지>허리띠>외투>신발 순서이다. 왕비나 여왕에게도 해당 직책을 맡는 귀족 부인들이 있었다.

청결관은 공작(公爵)이나 후작(侯爵) 수준의 높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헨리 8세때는 4명 정도가 있었다. 헨리(Henry) 8세의 똥을 치우던 공작은 다른 귀족들에게 질문을 받자 "뭐, 그분이 대식가라는 건 알겠더군요."라고 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내시처럼 왕과 가장 가깝고 은밀한 공간에 함께 있다 보니 왕과 왕실의 개인사와 비밀, 정치, 행정 업무를 알 수 있었기에 왕이 가장 신임하고 지위도 높은 인사가 이를 맡게 된 것이다.

*** 건강한 똥의 기준은 무엇인가. 물론 똥도 개인차가 있고, 그날 섭취하는 음식의 양과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황금색을 띄며 ▶굵기는 2cm 정도 ▶길이는 약 12~15cm이며 ▶냄새가 없는 똥이 건강한 똥이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똥은 지름 2cm 굵기의 바나나 모양으로 냄새는 지독하지 않다. 대변에서 냄새가 안 날 수는 없겠으나 숨을 못 쉴 정도로 악취가 나면 좋지 않다.

#그렇다면 똥·오줌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조선 숙종(肅宗) 37년(1711) 《승정원일기》에 예문관(藝文館)의 측간을 소제하는 전연사(典涓司) 군졸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궁궐의 뒷간 청소를 담당하는 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에는 평소 3000여명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전연사 인력은 고작 48명이어서 궁 안에서 발생하는 인분 등을 제때 제대로 처리하기엔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이들은 인분뿐만 아니라 궁궐 내의 쓰레기 분리수거 및 처리까지 해야 했으니…. 궁궐은 그렇다 치고, 여염집의 똥오줌 처리도 문제였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울 등 도시에는 똥오줌을 처리하는 사람을 '똥퍼'라고 했는데 골목골목 다니면서 "또오옹 퍼어~"를 외치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별호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한양에서도 이런 '똥퍼'가 있어 일반 백성 등 뒷간에서 나오는 똥오줌을 처리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쓴 세태풍자 소설 가운데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엄행수'란 인물이 바로 '조선판 똥퍼'인 전문 똥오줌 수거인(收去人)이었다. 그는 9~10월경에 사람 똥은 물론,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등 온갖 똥을 수거해 순무, 가지, 오이, 수박, 호박,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 미나리, 토란 등의 농사꾼에게 팔았으며, 그 수입은 1년에 6,000전(600냥)이었다고 연암은 엄행수의 덕을 칭송하고 있다.

(*1960년대 중산층 월급은 3000원 정도인데 당시 '똥퍼'가 한번 풀 때마다 받는 돈은 100원이었다. 하루에 5번만 푼다고 해도 500원, 한 달이면 1만5000원이나 됐고, 더구나 그들의 주된 수입은 그 똥을 농장에 파는 것이었는데 '똥값'이 푸는 돈의 몇 배나 됐으니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연봉이 1억은 훨씬 넘는 수준이다.)

조선 후기 한양 인구는 20만 명이나 돼 배를 이용해 분뇨를 멀리 양평과 김포까지 퍼 날랐다.

근대적인 오물처리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개항 이후 일본인 거주 지역에서 시작됐다. 예덕선생 같은 민간비료장수들이 민간에서 나오는 분뇨를 무상으로 수집해 농부들에게 팔던 것을 1908년 관제 위생 조합인 '한성위생회(漢城衛生會)'가 도맡아 서울 거주 주민들로부터 돈을 받고 오물 수거 및 처리업무를 하게 된 것이다. 1914년 부제(府制)가 시행되면서 한성위생회가 해체되고 각 지역의 오물청소 사업은 부(府) 당국, 즉 지자체 업무로 이관됐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분뇨 처분장이 밤섬과 동대문 밖에 있었는데 1920년대에는 광희문 밖, 독립문 밖, 이촌동 세 곳에 오물을 버렸다. 그러다 1936년 '조선오물소제령(朝鮮汚物掃除令)'이 제정돼 전국적인 오물관리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1936년 6월 5일 반포, 10월 1일 실시) 이때 재(煤灰)가 오물의 종류에 추가됐다. 이는 가정용 재뿐만 아니라 공장에서 나오는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1930년대 서울의 오물처분장은 5곳이 있었는데 4곳은 분뇨 전문이었고, 동대문 처분장이 분뇨 외에도 진개, 즉 쓰레기를 처리했다. 분뇨처분장은 분뇨를 모아두는 곳으로 서울 밖의 농부들에게 거름으로 팔았다. 분뇨의 판매는 1927년부터 '경성비료주식회사'에서 독점으로 맡았다가 계약이 만료된 이후로는 1937년 4월 1일부터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경기도지부가 담당했다. 쓰레기는 동대문 밖 오물적치장에서 처분되다가 1942년 4월 1일부터 뚝섬(纛島) 에 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의 땅을 빌려 반출했다. 당시 경성부(京城府)는 수거한 일부 분뇨는 농촌으로 보내고 나머지 60% 정도는 한강에 버리는 방법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겨울에는 강물이 얼어 분뇨를 버릴 수 없었고, 각 가정의 똥통마저 얼어붙어 수거조차 이뤄지지 못 했다. 분뇨종말처리장 건설 계획이 1937년부터 추진됐으나 실현되지 못해 사실상 분뇨의 한강 투기는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광복 이후에도 '조선오물소제령'이 그대로 적용돼 일제 때 만들어진 도시청소 체계가 그대로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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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