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 영국이 자동차 산업을 망친 이유
영국의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해 소형 자동차에 집중해야 하는데 대형차에 초점 대량생산 토대 마련 외면하고 파업 성행…막대한 정부 보조금 지원 불구 사라져
GM, 도요타, 포드, 폭스바겐, 다임러크라이슬러, 푸조, 현대, 닛산, 혼다, 르노.
세계 자동차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거대 메이커들이다. 한데 좀 이상한 점을 못 느꼈는지? 맞다, 영국 회사 이름이 안 보인다. 미국, 독일, 일본에 한국 회사도 끼어 있는데 그렇다.
돌이켜보면 이상한 일이다.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은 자동차가 등장해 막 산업으로 자리 잡을 때 선진 공업국이었다.
기계제조와 공학기술이 앞섰고, 숙련된 금속 노동자들도 앞에 꼽은 어느 나라보다 많다. 국민소득도 높으니 당연히 잠재적 '시장'도 컸다. 한데 그렇게 조건이 유리했던 영국이 어떻게 '자동차 약소국'이 되었을까? 세계 경제 600년사를 뒤져 왜 어떤 나라는 흥했는데 어떤 나라는 망했는지 분석한 『국가의 부와 빈곤』(데이비드 S. 랜즈 지음, 한국경제신문)에서는 그 이유를 흥미롭고도 간단하게 설명해 놓아 눈길을 끈다.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인 지은이는 한마디로 경영의 실패라고 정리했다. 영국의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했기 때문에 소형 자동차에 집중해야 했는데 영국 회사들은 운전기사를 고용할 만큼 부유한 구매자들을 겨냥해 크고 값비싼 모델에 초점을 맞췄다. 잠재 수요을 과소평가한 탓에 1912년 언론은 "어떤 회사도 충분한 수량을 만들어 염가로 공급할 큰 공장을 지을 만큼 진취적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야 미국 포드사의 조립라인 기술을 들여왔으나 영국 기업들은 대량생산을 위한 토대 마련을 외면했다. 빨라진 작업속도와 노동집약적 기술에 맞추려면 노동자들의 '협조'가 필요했으나 영국 경영자들은 이를 위한 전체 임금 인상을 거부했다.
대신 생산성이 높은 노동자들을 골라 그들에게만 보상을 주는 방안을 택했다. 그 결과 작업 리듬의 선택권이 노동자들에게 쥐어졌다. 고용주들은 성과가 좋은 작업자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면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향상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속도가 가장 느린 사람에게 작업 속도를 맞추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작업자들이 그룹이나 팀의 속도에 맞추는 것이 편안하고 득이 된다고 무언의 동조를 형성한 때문이었다.
영국 경영자들은 보너스 지급제도를 관리비용을 절감하는 방식이라 여겼으나 노동자들은 관습과 개인적 여유를 위해 생산성을 희생하고 그것이 공동체를 위해 도덕적이라 느꼈으니 미국 자동차회사들과 경쟁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비롯해 외국 자동차들이 밀물처럼 몰려 들어올 때 영국 자동차산업은 경쟁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저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의 근면성과 주의력 부족을 탓하고, 노동자들은 경영진의 경쟁력과 비전 부족을 탓하느라 바빴을 따름이다. 파업이 성행하고, 사양산업이라 판단한 은행들이 투자를 멈추자 공장은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해고되었다. 1975~84년까지 24억 파운드란 정부 보조금을 쏟아부었음에도 영국 자동차산업을 회생시킬 수 없었다.
지은이는 이 사례를 두고 서투른 경영이 국가경제를 망친 대표적 경우로 꼽는데 공감이 가는 지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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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