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44) 양산 주인은 원래 '권력 가진 남자'

하인이 받쳐 드는 양산은 태양이나 비를 피하는 실용적 목적 외에도 위엄과 권위 상징 르네상스 이후 흰 피부가 귀족여성의 미덕이어서 햇빛 가리는 양산이 여성필수품으로 일본은 2018년부터 '남성 양산 쓰기 운동' 전개…2021년에는 '남성 전용 브랜드' 나와

2025-08-01     송명견(동덕여대 명예교수ㆍ칼럼니스트)

수도권기상청이 7월 7일 서울시교육청과 경기도교육청에 "학생들이 하교할 때 양산을 쓰도록 해 달라"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이튿날인 8일부터 서울 등 수도권에 강한 햇볕과 함께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이 시작될 것으로 예보됐기 때문이었다.

초·중·고교 가릴 것 없이 학생들이 학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시간대는 기상청이 걱정하는 '하루 중 가장 더운 때'다. 따가운 햇볕과 자외선은 남녀 학생의 피부를 가려내 공격(?)하지 않는다. 남녀를 불문하고 학생들이 하교할 때 햇볕에 오래 노출되면 피부 온도가 오르고 심하면 화상을 입을 수도 있어 기상청이 '양산을 쓰라'고 당부한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 사회 통념은 대부분 남성들이 뙤약볕 아래 무방비 상태이면서도 '남자가 어떻게 양산을 쓰냐'고 묻는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젠더 인식과 관습이 엿보인다. 이런 점에서 '양산'은 햇볕을 가리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시대와 문화를 읽는 하나의 창이 된다.

양산(parasol)은 '막다(para)'와 '태양(sol)'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양산은 기원전(BC) 21세기 무렵부터 존재했다.

더구나 초기 양산의 주인은 다름 아닌 권력자 '남성'이었다. 하인이 받쳐 드는 양산은 태양이나 비를 피하는 실용적 목적 외에도 위엄과 권위를 상징했다. 하지만 이 남성 권력의 상징은 시간이 흐르며 여성의 전유물로 바뀌었다.

전환의 계기는 르네상스 이후 등장한다. 흰 피부가 귀족 여성의 미덕으로 여겨지며, 햇빛을 가리는 양산이 여성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는다. 이후 18~19세기에는 실크, 레이스, 자수로 꾸며진 장식적 양산이 유행했다. 여성은 연약하고 섬세해야 한다는 규범이 더해지며 양산은 점점 더 작고 화려해졌다. 단순한 햇빛 가리개가 아니라 '여성성'과 '계급'이 뒤섞인 문화 코드가 된 것이다.

이와 달리 남성은 산업화가 진행되며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존재로 규정된다. 그 결과 양산은 여성의 장신구가 되고, 남성의 손에서 점점 멀어졌다. 근대 이후 양산은 여성 소비자만을 겨냥한 '계절(여름) 상품'으로 고착되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고 있다. 1970년대 유니섹스 패션의 등장 이후 여성들은 남성복을 자유롭게 입고, 남성들도 화장과 향수, 액세서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오늘날 핸드백조차 이미 유니섹스 아이템이 되었다. 양산을 넣을 남성용 가방도 다양하다. '남성 양산' 역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

더구나 기후위기 시대 여름은 생물체의 생존을 좌우한다. 올해 7월 말 전국 곳곳의 기온이 섭씨 40도를 넘겼다. 자외선 지수는 매일 '매우 높음'을 기록 중이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5월 20일부터 7월 26일까지 발생한 온열질환자가 총 2311명, 그 중 사망자는 11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배 가깝게 증가했다.

양산은 자외선 차단 효과가 탁월하다. 인증된 제품의 경우 90% 이상의 자외선을 막고, 체감온도를 최대 10도까지 낮춰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서울연구원). 양산의 놀라운 혜택을 여성만 누리는 것은 어딘가 억울하지 않은가.

일본은 2018년부터 '남성 양산 쓰기 운동'을 전개했다. 2021년에는 남성 전용 양산 브랜드까지 나왔다. 한 해 판매량이 40만 개를 넘고, 2023년 일본경제신문이 선정한 트렌디 히트상품 14위에 '남성 양산'이 오르기도 했다.

세계 양산 시장은 2024년 기준 약 1억 달러 규모이고, 2031년까지 약 2억2000만 달러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10% 이상 성장하는 고속 시장이다. 국내 양산 시장은 아직 작지만, 2024년 약 250만 달러(한화 약 33억원)로 추정된다. 남성 소비층이 본격 진입하면 시장 잠재력은 결코 작지 않다.

양산은 어쩌면 유니섹스 시대의 마지막 남은 경계선일지 모른다. 핸드백이 남성의 손에 들리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지만, 양산은 지금 당장 넘어도 되는 선이다. 산업은 변하고 있고, 시장도 이미 깨어나고 있다.

"남자가 어떻게 양산을 써?"라는 물음은 이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왜 아직도 남성은 양산을 쓰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