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 바비인형에 쓰인 '미사일 기술'
獨신문 연재만화 캐릭터를 본뜬 인형 인기끌자 미국 장난감 회사서 상품화 미사일 회사 다니던 엔지니어가 팔다리 관절을 만들어 붙여 특허권 획득해 1959년 美장난감박람회서 선보인 후 40년간 150개국서 10억개 넘게 팔려
전쟁은, 그 참혹한 결과와는 별도로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계기가 된 사례가 적지 않다. 이와 관련해 전쟁과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빚어낸 과학기술사 이야기를 모은 책이 있다.
미국의 과학기술 전문기자가 쓴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피터 노왁 지음, 문학동네)란 책인데 여기서 눈길을 사로잡은 대목을 만났다.
적어도 딸을 길러 본 부모라면 '바비' 인형은 다들 알 것이다. 왜 있잖은가? 금발에 가느다랗고 기다란 팔다리, 몇 달 굶은 듯한 여윈(?) 몸매의 인형 말이다. 요즘은 '정치적 올바름'이니 뭐니 해서 인기가 시들해진 감도 있고, 외형도 좀 바뀌었다지만 2000년대 후반만 해도 전 세계에서 일 초에 3개씩 팔렸다는 소녀들의 최애 인형이었다.
그 바비 인형의 원조는 한 독일 신문의 연재만화 캐릭터였단다. 1952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독해력이 떨어진 사람들을 위한 타블로이드 신문 빌트 자이퉁이 창간됐다. 선정적이고 불확실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가십성 기사를 많이 싣는 대중지였는데 라이하르트 뵈티엔이란 이가 여기에 릴리라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를 연재했다. 릴리는 연한 금발에 키가 크고 조각상처럼 예쁘지만 염치가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성적 매력을 내세우며 남자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캐릭터였다.
한데 릴리가 의외로 인기를 끌며 돈을 끌어모으자 빌트 자이퉁은 아예 장난감 회사에 의뢰해 인형을 만들어 팔았다. 당초에는 볼륨 있는 몸매에 깊게 파인 블라우스, 짧은 치마 차림의 성인용이었지만 인기가 하늘을 찌르자 곧 장난감 회사에서 선정성을 누그러뜨린 아동용도 제작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한데 유럽에서 휴가를 보내던 미국 장난감 회사 마텔의 루스 핸들러 회장은 이 인형의 시장성에 주목했다. 핸들러 회장은 1957년 기계식 장난감 제조업자를 찾으려 일본에 출장 가는 엔지니어 잭 라이언에게 릴리 인형을 주고 똑같이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라 지시했다. 라이언은 일본의 고쿠사이 보에키사와 인형 주문생산 계약을 맺었는데 고쿠사이 사는 독일 매춘부 분위기를 덜어낸 인형을 만들어냈다.
바비 인형의 인기 비결은 회전 성형기법을 이용해 라인이 더 부드럽고, 다양한 액세서리와 의상이 소녀들의 환상을 충족시켜준다는 점이 가장 컸다. 그러나 라이언이 유연하면서도 튼튼한 큰 팔다리 관절을 만들어 붙인 것도 못지않게 기여했다. 그런데 라이언은 마텔사 이전에 지대공 미사일을 만드는 레이시언사에 근무했으며 이때 쌓은 전문지식이 이 특허기술을 개발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핸들러 회장의 딸 바바라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바비'라 이름 붙인 이 인형은 1959년 미국 장난감박람회에서 선보인 이래 40년 동안 150개국에서 10억 개가 넘게 팔리는 선풍적 인기를 모았다. 어린아이들이 환호하는 인형에 미사일 만들던 기술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과학기술은 그야말로 쓰기 나름"이란 말이 실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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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