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수의 이솝 경제학] (47) 신뢰 잃은 '양치기 소년'의 업보
IMF외환위기때 신뢰 중요성 뼈저리게 느껴 … 정부와 기업 믿지 못한 외국인들 돈 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오락가락 관세 정책이 국제 금융 시장의 근간을 위협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서 양을 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매일 혼자 양을 돌보는 일이 심심했던 양치기는 장난치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뭐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옳지 이렇게 하면 재밌겠는 걸.'
양치는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라도록 다급한 목소리로 힘껏 소리쳤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늑대가!"
양치기의 목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양을 구하기 위해 저마다 몽둥이를 들고 서둘러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습니다. "늑대는 어디 있니?" 마을 사람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장난꾸러기 양치기는 그 모습을 보고 배를 움켜쥐고 웃었습니다. "늑대는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냥 연습을 해봤을 뿐이에요,"
마을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며칠후 양치기는 다시 소리를 질렀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어서 와서 살려주세요!"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양치기를 돕기 위해 또 다시 언덕으로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늑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연습이어었어요. 하하하, 정말 재밌구나!"
양치기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했습니다. 또 다시 양치기에게 속은 것을 알고 마을 사람들은 화를 내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진찌 늑대들이 나타났습니다. 사나운 늑대들은 양 떼를 마구 헤치기 시작했습니다. 양치기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늑대가 나타났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엔 정말이에요! 정말로 늑대가 나타났다고요!"
양치기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도 양치기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마을 사람들은 언덕으로 달려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장난으로 거짓말을 하던 양치기는 양들을 몽땅 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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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는 돈 벌게 해주는 자본=한번 무너진 신뢰는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는 우화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양치기 소년의 말에 속아 넘아갔지만 거짓말이 반복되자 진실을 말해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면 신뢰를 잃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뢰의 상실은 파멸을 뜻합니다. 반대로 신뢰를 쌓으면 번영을 저절로 다가옵니다.
경제에서 신뢰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 바로 1997년 IMF외환위기 때였습니다. 한국정부와 기업을 믿지 못하게 된 외국인들이 한꺼번에 빠져 나가는 바람에 금리와 환율이 치솟고 주가 폭락하는 등 나라 경제가 요동을 쳤습니다. 사람들은 IMF 경제 위기를 거치면서 다른 나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개방경제에서는 신뢰가 정말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신뢰가 윤리적이고 정서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개인과 기업, 나아가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주요 원천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죠. 현재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것도 그동안 신뢰를 쌓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뢰는 하나의 자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 신뢰가 돈을 벌게 하는 밑천인 자본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선 장사하는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거래를 하려고 합니다. 신용을 안 지켜 신뢰가 안가는 사람은 기피대상이 되므로 돈을 벌 수 없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계장부를 정직하게 작성하는 기업에만 투자자들이 물리게끔 돼 있습니다. 엉터리 회계장부로 신뢰를 잃는다면 투자자들은 그 기업에서 손을 떼겠죠. 외국인들도 기업을 투명하게 경영하는 나라에만 투자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볼게요. 과거에는 생산에 기여하는 물적 자본이나 금융자본이 중요했으나 이제는 그에 못지 많게 인적 자본, 지식 자본, 자연 자본, 문화 자본,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요. 사회적 자본은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이익을 위해 조정 및 협동을 촉진하는 규범, 신뢰, 네트워크를 의미합니다. 이중 신뢰는 디지털 시대에 사회적 자본의 핵심요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신뢰의 효용과 그것이 사라졌을 때의 비용은 택배산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택배가 도착했다는 알림을 받더라도 바로 집에 가지 않습니다. 집앞의 택배가 도난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신뢰가 없다면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합니다. 택배도난 방지를 위해 일찍 퇴근을 하거나 모임에서 일찍 헤어져야 합니다. 아니면 택배 도난 방지 설비를 설치하거나 누군가를 집으로 보내야 합니다. 사회적 신뢰가 있기에 그 많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지금의 택배산업이나 온라인 유통산업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다른 산업 시스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자본으로서의 신뢰는 거래의 효율성을 증진시켜 경제 성장에 기여합니다. 계약의 이행을 감독하고 보호하는 비용과 재산권을 보호하는 데 드는 비용 등은 경제 성장의 장애요소입니다. 신뢰는 이러한 거래비용을 줄임으로써 경제성장에 기여합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유럽국가들에서의 일반적 신뢰도와 1인당 GDP(국내총생산) 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일반적 신뢰수준이 높을수록 1인당 GDP가 높았고 실업률도 낮았습니다. 신뢰는 사회갈등을 완화시켜주며 사회의 안정성을 유지해주는 주요 자원이 됩니다. 환경·범죄·교통·주거·건강·노동 등에서 발생하는 사회비용을 감소시키는 데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져옵니다.
무엇보다 신뢰는 불확실성이 존재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필요합니다. 신뢰는 미래 행위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입니다. 상대방이 미래에 긍정적 행위를 할 것이라는 강한 기대가 있는 경우 위험성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신뢰는 다른 사람이나 기관이 긍정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는 개인의 믿음으로 정의될 수 있습니다. 신뢰는 그 대상이 기대에 부응해 행동하고 바람직한 행동을 할 때 형성됩니다.
◇신뢰의 위기 닥친 미국, 어디로?=최근 전문가들 사이에서 미국 국채 시장이 전례 없는 혼란에 휩싸이며, 오랫동안 '무위험 자산'으로 여겨졌던 미국 국채의 근본적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음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과 부채 정치화가 금융 시장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특히 트럼프의 관세정책은 목표가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입니다. 트럼프는 관세를 통해 정부 수입을 늘려 세금을 낮추겠다고 하지요. 게다가 무역 적자를 줄이고, 제조업도 되살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말 그대로 관세를 모든 문제의 해답인 양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정작 이런 정책 목표들은 상호 충돌하는 부분이 많아 트럼프가 원하는 성과를 거두긴 어렵다는 예상입니다. 예를 들어 외국 기업이 미국에 제조 공장을 지으려면 적어도 수십 년 동안 관세가 현 수준으로 유지될 것이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몇 년 뒤 관세가 확 낮아져 버리면 굳이 막대한 돈을 들여 미국에 공장을 지을 필요가 없어지겠지요. 그런데 트럼프는 미국에 투자를 하면 관세율을 낮춰주겠다고 합니다. 관세율이 기준 없이 오락가락하는데, 기업들이 어떻게 투자를 하겠습니까?
관세 전쟁으로 미국 경제의 피해가 더 크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미국은 글로벌 경제의 패권국입니다. 미국이 경제 제재를 가하면 상대국이 맞선다고 한들 훨씬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경제 제재를 선호한 것도 '우리는 적게 맞고, 상대는 많이 때릴 수 있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관세 전쟁에서 미국은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대가를 치를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미국 중심의 글로벌 경제 질서에 대한 신뢰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우선 미국 국채 매입은 곧 미국 정부에 돈을 빌려주는 행위인데, 미국 경제가 흔들리면 투자자들이 불안감이 더해져 미국 국채 수익률이 오르고, 글로벌 외환보유고에서 달러 보유량이 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요. 더구나 미국이 지금처럼 자의적이고 변덕스럽게 관세 정책을 남발하면 달러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가 훼손되고 결국 달러 패권이 무너지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결국 달러가 기축통화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이야기인데요. 지금까지 '달러 체제'가 살아남은 이유는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였지요. 중국은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밀고 있지만 정부의 자본 통제와 자본시장의 유동성 부족 탓에 위협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많습니다. 하지만 유로화는 글로벌 외환 보유량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유럽 경제도 점점 살아나고 있습니다. 유로화가 달러의 위상을 무너뜨리면서 다극적 통화 체제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어가는 형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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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코리아헤럴드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중앙일보에서 20년 넘게 금융·증권 분야를 취재, 보도하면서 이코노미스트 편집장, 재산리모델링센터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여러 매체에 금융시장, 재테크, 노후준비 등의 주제에 관해 기고도 했다. 저서로는 <이솝우화로 읽는 경제이야기>, <2012 행복설계리포트>, <거꾸로 즐기는 1% 금리(공저)>, <누구나 노후월급 500만원 벌 수 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