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 선조 여섯째 아들의 '패악질'
중전의 장례기간중 궁녀를 대낮에 겁탈하고 유배지에서도 백성들에게 몽둥이질로 원성 큰형 임해군은 여기에 한술 더 뜬 모양…광해군이 둘째아들임에도 왕에 오른 까닭 있어
"…하는 일이 모두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으로 잔혹하기 그지없으니…주색잡기와 같은 것에 광패한 사람이라면 그래도 괜찮겠으나…조정 대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가 없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다. 그가 자신의 여섯 번째 아들 순화군 이보(李·1580~1607)를 두고 한 이야기인데 『선조실록』에 나온다.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임금이 신하들을 볼 낯이 없을 정도로 순화군은 왕자의 품위는커녕 역대급 사이코패스였다.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 간 선조와 떨어져 큰형 임해군과 함께 군사를 모으려 함경도로 갔는데 두 형제가 어찌나 패악질이 심했는지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이들을 잡아 왜군에 넘겨 인질 생활을 했을 정도였다.
전국에 산재한 비문, 암각 글씨를 찾아 이를 소재로 역사 이야기를 풀어간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역사』(배승호 지음, 푸른역사)에는 '선조의 문제아 아들들'이란 별도의 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중 순화군의 행실은 특히 두드러진다.
임진왜란 말기에는 여러 차례 살인을 저질러 해마다 10명 가까이 죽였다. 선조의 첫 중전-자신을 낳아준 모친은 아니다-의 장례를 치르는 중에 중전을 모시던 궁녀를 대낮에 겁탈했다. 이에 선조가 순화군을 경기도 수원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수원 부사를 두들겨 패고, 올린 채소가 신선하지 않다고 백성에게 직접 몽둥이질을 하고, 소고기를 올리지 않는다고 창고지기 집에 불을 지르고, 여자 무당을 잡아다가 이빨을 빼버리는 바람에 과다출혈로 죽게 만든다.
결국 수원 백성들이 순화군의 행패를 피해 피란을 가는 통에 수원이 망할 지경에 이르자 선조는 순화군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서인으로 폐하고 가택연금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그의 패악질은 멈추질 않아 순화군이 온다는 말만 들어도 사람들이 도망치곤 했단다.
그 문제의 순화군은 26세에 풍병으로 세상을 떠나 지금 경기도 남양주 별내의 수락산을 넘는 고개, 순화궁 고개 인근에 묻혔다. 가당찮은 것은 『실록』에 실린 순화군의 졸기(卒記)에는 "비록 임해군과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지만…"이란 구절이 나온다. 임해군은 선조의 맏아들, 정원군은 다섯 번째 아들이니 이들의 패악질 또한 '사이코패스' 순화군을 능가했던 모양이다. 책에는 조정으로 가는 공물을 가로채는 것은 기본이고, 도승지 유희서의 첩을 뺏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유희서를 살해하거나(임해군), 처남을 과거시험에 부정합격시키거나 노비들 간의 싸움을 이유로 큰어머니인 하원군 부인을 납치하는(정원군) 등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훗날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이, 선조의 둘째 아들임에도 왕위에 올랐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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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