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훈의 세상만사] ⑩ 봄 폭설 속 매화예찬
농원뿐만 아니라 가로수로 심어져 흔히 볼 수 있지만 1980년대까지는 귀한 존재 호문목(好文木) … 글 열심히 읽으면 매화 나무에 꽃이 핀다는 고사서 유래한 말
입춘이 지난 지 한 달이 넘었건만 아직도 아침저녁으론 여전히 선뜻하다. 춘분을 이틀 앞두고도 눈보라가 쳐댄다.
요새 날씨는 도시 종잡을 수가 없다. 코끝이 얼얼하게 춥다가도 다음날 느닷없이 영상 10여도까지 치솟는 널뛰기가 다반사이다. 어느 날 제법 푸근해지면서 언 땅거죽이 질척거려 해토머리려니 했는데 또 다시 얼음살이 박힌 게 몇 번이었던가.
그래도 요즘 햇살이 노골 노골해진 게 엄동 때와는 판연히 다른 걸 보니 봄이 가까이 오긴 온 모양이다. 바야흐로 봄이고, 또 봄이어야 한다. 하지만 대동강이 풀린다는 우수에 영하 10도로 떨어지고 겨울잠 자던 개구리도 깨어난다는 경칩에 이어 또 다시 폭설을 경험한 터라 아직까지 미심쩍은 마음에 여전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헌데, 이 같은 혼돈 속에서도 내 의증(疑症)에 금이 가는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바로 10년 넘게 애지중지하는 매화나무가 미처 예상도 못하는 참에 꽃망울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폭설이 내린 경칩에 눈바가지를 뒤집어쓴 채-. 경칩은 그 해 첫 천둥이 치고, 그 소리에 겨울잠을 자던 온갖 생물들이 놀라서 뛰쳐나온다는 것인데 올 경칩엔 그네들보다 내가 더 팔짝 뛸 만큼 놀랐으니 사건이랄 수밖에. 졸지에 설중매(雪中梅)가 된 형국이지만 사실 이 '매형(梅兄)'은 노지에서 풍상을 겪지 않도록 커다란 화분에 모시는 귀물(貴物)이다. 30여년을 함께 한 매화나무를 어느 겨울 모진 추위로 덧없이 떠나보낸 뒤 10여년쯤 전 새로 들인 터라 해마다 한겨울엔 집안에서 피동(避冬)토록 해왔다. 지난 겨울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우수가 지나면서 날씨도 누그러지는 것 같고, 어느 결에 등걸에서 하늘로 곧추 뻗어 올린 마들가리에 푸른빛이 돌기에 옳다구나 하고 밖으로 내놓았더랬다. 매화나무는 바로 이 가지에서 꽃을 피우는데 때깔이 마치 물오른 버들가지마냥 퍼래지면 꽃눈이 통통하게 차오르기에 기대감에 부풀어 내린 결단이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전날에는 꽃망울 대여섯이 새콩만큼 부풀어 흰자위가 비치는지라 설렘도 커져 날이 바뀌기만 기다렸다. 그런데, 아뿔싸! 이게 웬 조화란 말인가. 간밤에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갑자기 눈, 그것도 폭설이 덮쳤으니. 가뜩이나 이미 한번 매화나무와의 사별(死別)을 겪었던 터라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서둘러 다시 집안으로 들여놓으려 허둥지둥 가지에 쌓인 눈을 터는 순간 또 까무러칠 뻔 했다. 눈 속에서 활짝 핀 매화가 무려 다섯 송이나 환한 웃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본디 하얀 얼굴에 하얀 눈으로 화장을 한 셈이라 더욱 뽀샤시한 분위기마저 연출하고 있었다. 차가운 기온에 눈이 살짝 얼었음에도 냉백(冷白)이 청백(淸白)이 되면서 외레 포근했고, 더욱이 반나마 벙근 꽃송이도 예닐곱은 되는가 싶어 놀란 가슴은 언제였는지 모르게 화분을 든 채 그만 웃고 말았다. 그리고 매화분을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두었다. 매화는 모진 추위를 겪어야 맑은 향기를 내는 법(梅經寒苦發淸香)-.
#나는 매화를 좋아 한다. 감히 매벽(梅癖)을 운운하는 매화치(梅花癡)까지는 아니지만 매화를 몹시 사랑한다. 나는 매화로 봄을 알고, 느끼며, 맑은 정신을 챙긴다. 하지만 그건 불혹(不惑)이 지나고 나서부터다. 아예 삼십 중반까지는 매화나무를 본 적도 없다. 요즘이야 겨울이 채 가기도 전에 봄소식을 전한다며 겨우 멍울이 진 매화를 TV다 인터넷이다 해서 요란 뻑적지근하게 생중계하는 등 난리를 치고, 남녘엔 대규모 매실농원들뿐만 아니라 동네 공원, 심지어 가로수로까지 심어져 흔히 볼 수 있는 게 매화나무이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부러 발품을 팔아야만 접할 수 있는 귀한 존재였다. 더구나 온난화 땜에 그런지 예전 같으면 틀림없이 얼어 죽었을 땅에서도 버젓이 겨울을 나니 이젠 중부지방에서도 어딜 가나 한 두 그루쯤 만나는 건 일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참 기가 막히는 변화다. 따지고 보면 예전엔 그럴 만도 했다. 매화나무란 게 배부른 호사가들한테는 멋지게 보였을지라도 먹고 사는 게 간당간당한 민초들에겐 별 볼 일없는 존재였으니까. 꽃타령은 둘째 치고 과실이라도 실하면 좋으련만 맛이 시기만 할뿐 열매알갱이는 죄다 잔챙이이니….
매화가 이 땅에 들어온 게 삼국시대보다 전이라는데 복숭아꽃, 살구꽃처럼 우리말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지금까지 한자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얼마나 대중적이지 못한 꽃이요 나무였는지 알 수 있다. 또 화엄매(華嚴梅), 자장매(慈藏梅), 선암매(仙巖梅), 고불매(古佛梅), 율곡매(栗谷梅) 등 고매(古梅)라 불리는 오래 된 매화나무들도 모두 큰 사찰이 아니면 사대부 집 등 특수 집단에서 관리돼 온 것들이란 점도 저간의 사정을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남녘이 아닌 곳에선 추위 때문에 노지 월동이 불가능했을 테니 서울 근교 토박이로 자라면서 매화를 알지 못한 게 당연하고,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다.
#내가 매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고교시절 교과서를 통해 시인이면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이육사(李陸史,본명 源祿·1904~44)의 시 <광야>를 배우면서부터.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언제 읊조려도 가슴을 후끈케 하는 이 시에서 비장한 웅혼(雄魂)과 함께 고결한 결기를 약속하는 시어(詩語)가 바로 '매화'다. 일제의 강압 속에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독립운동을 몸소 실천하다 고작 마흔에 옥사한 선생이 요즘말로 '중꺽마'의 상징으로 여긴 게 다름 아닌 매화였다. 무려 열일곱 번이나 옥고를 치르면서도 결코 지조를 잃지 않은 선생의 굳세고 고결한 선비정신이야말로 모진 추위를 이기고 맑은 향기와 함께 꽃을 피우는 매화의 품격이 아니면 무엇이랴. 매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까닭은 '뜻 있는 삶'을 꿈꾸는 나의 작은 실천이다.
#중국의 강남이 원산지인 매화나무가 이같이 고난과 역경의 극복, 절개와 지조의 표상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의 발흥과 함께 선비문화가 등장한 북송 무렵부터. 그 이전엔 '맛이 신 열매'가 달리는 나무일 뿐, 그나마 꽃이 일찍 피는 덕분에 한무제(漢武帝·기원전 141~기원전 87)때 황실정원인 상림원(上林苑)에 심기면서 완상의 목록에 들기 시작한 '그저 그런' 존재였다. 오죽했으면 그 옛날엔 매화나무를 뜻하는 한자가 요즘 쓰는 '梅'가 아니라 녹나무를 뜻하는 '枏,楠(남)'이었을까.
이 같은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화나무가 문헌에 처음 나오는 것은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대무신왕(大武神王·4~44)24년 기사 '8월, 매화꽃이 피다'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관계로 볼 때 그보다 훨씬 전에 들어왔을 테다. 하지만 그 뒤에도 널리 알려지진 않은 듯 고려 후기까지 매화의 흔적이 그리 많지 않다. 그것조차 그냥 일찍 피는 꽃에 대한 찬사뿐이다. 그러다 고려 후기에 송나라에서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선비문화의 하나로 매화에서 '정신'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국화하면 도연명이듯이 매화가 은일고사(隱逸高士)의 고격(高格)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 건 송나라 임포(林逋·967~1028)덕분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박학다식했던 그는 세속의 번다함을 싫어해 주위에서 벼슬에 나갈 것을 권유하는 걸 마다하고 항주 서호(西湖)부근 고산(孤山)에 은거해 처자식 없이 매화를 300그루나 심고 학과 사슴을 기르며 살았다.
바로 '매처학자(梅妻鶴子)'의 주인공이다. 그의 시 <산원소매(山園小梅)>에 나오는 '疏影橫斜小淸淺(소영횡사소청천: 성근 매화 그림자 맑은 냇물에 빗겨 비치고)/ 暗香浮動月黃昏(암향부동월황혼: 그윽한 향기 어스름 달빛 아래 떠도네.)'는 천하의 절구(絶句)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이 시엔 '梅'자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데도 고사의 풍류를 채우는 한 축으로서 매화의 고아한 품격을 핍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로부터 '疏影', '暗香'하면 매화를 가리키고, 매화가 문인화에 그려지는데 월매도(月梅圖), 도수매(倒垂梅)는 거의 양식화되다시피 했다.
#선비들이 끔찍이 여겼던 정신세계의 경물(敬物)이 매화다. 송대(宋代)에는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명대(明代)에는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에 꼽혔으니 나무로 양쪽에 모두 든 건 매화뿐이다. 매화를 두고 빙자옥질(氷姿玉質)이요 아치고절(雅致高節)이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매화문화가 만발한 건 조선에서였다. 시·서·화에 두루 주제가 됐다.
조선의 선비 가운데서도 매화 사랑이 각별했던 이는 단연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70)선생이다. 퇴계는 '매처학자' 임포를 사모해 매화를 유난히 사랑했다. 선생께서 남긴 매화시만 107수나 되는데 책을 읽을 때는 매화무늬가 있는 매화등(梅花凳)에 앉고, 매화연(梅花硯)에 먹을 갈아 글을 쓰곤 했다. 임종을 앞두고는 자신의 모습을 매화분재에 보이기 싫어 다른 방으로 옮기게 한 뒤 "매화분재에 물을 주라"는 말씀을 남기고 운명했을 정도다. (*이육사 선생이 퇴계의 14세손이라니 매화 사랑도 피물림한 게 틀림없다.)
#매화에 대한 사랑이 깊고 오래다 보니 얽힌 사연도 많고 별칭도 가지가지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끌리는 것이 '호문목(好文木)'이다. 중국 진(晉)의 무제(武帝·236~290)가 공부할 때 글을 열심히 읽으면 매화나무에 꽃이 피고, 책 읽기를 게을리 하면 꽃이 시들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또 매화촌(梅花村)이라 하면 단순히 매화가 핀 마을이 아니라 그곳에 학식과 덕이 높은 고결한 선비가 살고 있다는 상징어다.
지금 우리 집 문 앞엔 삼백 송이가 좋이 되는 매화가 춘설을 흠씬 뒤집어쓰고서도 만발해 있다. 이만하면 가히 매화촌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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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