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훈의 세상만사] ⑧ 정월 대보름의 추억
정월 명절은 설날 시작해 대보름날 끝나 … 풍성한 것으로 치면 정월 대보름이 나아 금기도 많아 오전에 마당 쓸면 복 나간다고 했고 머리 감으면 부모상 당한다고 여겨
#정월 명절은 설날 시작해 대보름날 끝난다. 정월 명절에서 의미로는 '새 해 첫날'이란 점에서 설날이 더 중요할지 모르지만 풍성한 것으로 치면 다양한 풍속이 치러지는 정월대보름이 한결 나았다.
연중 세시풍속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정월에 있는데 정월 행사의 절반 이상이 정월 열나흘 날부터 대보름날 이틀 동안 이뤄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는 달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는 음력(陰曆)을 사용하는 사회에서 첫 보름달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해준다.
농경사회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생산력인데 '생산은 곧 출산'으로 통한다는 믿음에서 여신(女神)의 관할, 즉 음성적(陰性的) 영역의 일로 보고 음(陰)의 대표랄 수 있는 달에 대해 끔찍이 여겼던 증거이자 흔적이다. 음력 8월 보름에 치르는 한가위 명절도 같은 맥락이다.
#정월대보름이 다가오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맘과 몸이 분주하기 마련이었다. 전날인 열나흘 날부터 이것저것 할 게 많기 때문이었다. 우선 남정네는 땔나무를 아홉 짐 하고 새끼를 아홉 발을 꼬아야 하며, 아낙네는 빨래를 아홉 가지 하고 학동은 글을 아홉 번 읽고 쓴 다음 밥을 아홉 끼니 먹어야 한다고 했다.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땔나무며 농사에 꼭 필요한 새끼 등을 부지런히 준비하고 배도 두둑하니 채워 힘을 쟁여놓으라는 의미의 풍속이다.
#이날은 갖가지 묵나물에 쌀, 보리(조), 수수, 콩, 팥으로 만든 오곡밥을 먹었다. 오곡이란 찹쌀, 수수, 기장, 콩, 팥을 이르지만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의탁한 것일 뿐 굳이 종류가 고정된 건 아니고, 묵나물도 애호박고지, 무시래기, 취나물, 고사리, 버섯, 말린 가지 ,아주까리 잎, 토란줄기, 고구마줄기 등 열아홉 가지를 들지만 형편이 되는대로 가급적 다양한 맛과 영양분을 섭취하도록 하면 그만이었다.
우리 계에선 제야(除夜)의 수세(守歲) 대신 정월 열나흘날 밤에 잠을 자지 않고 새우곤 했다. 이날 잠을 자면 부정을 타고 눈썹이 세는 것으로 믿었는데 아이들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이 들면 밀가루를 눈썹에 묻혀 놀리는가 하면 잠든 어른한테는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침을 놓기도 했으니 참을성을 기르는 풍속이었다. 이날 밤엔 해코지하는 귀신을 쫓기 위해 마루와 부엌, 외양간, 장독대, 우물, 헛간 등은 물론 뒷간에 까지 불을 훤히 밝혀 두었다. 그런데 이 귀신은 수를 세는 걸 좋아한다며 눈이 가는 체를 여기저기 걸어두어 귀신이 체의 눈을 세느라 사람한테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예방책(?)도 썼다. 밤을 새우기 위해 방에선 윷놀이나 화투치기를 하는 사이 젊은이들은 밥을 훔치러 집집이 돌아다녔다. 훔친 밥과 나물을 들고 마을 회관이나 마을방에 모여 커다란 그릇에 한데 섞어 비빈 뒤 여럿이 함께 나눠먹곤 했다. 말이 훔치는 거지 실은 집집마다 이를 위해 오곡밥과 나물 등 반찬을 넉넉하게 준비해놓는 법이어서 이를 통해 친목을 다지는 방식이었다. 공식(共食)만큼 한 식구임을 확인케 하는 것은 없을 테니까.
#언제나 그렇듯이 행사가 많을수록 고단한 건 울 엄니였다. 먹을거리, 입을 것 등 당신의 손을 거치지 않고선 도대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보름날 새벽 첫닭이 울고 나면 아직 보름달의 자태가 뚜렷할 때 엄니께선 슬그머니 밖으로 빠져 나와 오지물동이를 이고선 오백 걸음쯤 떨어진 우물로 가 바가지로 샘물을 떠 담으신다.
행여 수정보다 더 맑은 물거울이 깨질세라 한껏 조심스레 떠올리는 바가지엔 밝디 밝은 대보름달이 둥두렷이 떠있다. 아니, 달이 아니고 '용알(龍卵)'이다. 이 물로 밥을 지으면 우리 식구 모두 무탈하리란 기도가 외레 대보름 달빛보다 거룩하다. 엄니가 물동이를 이고 대문을 들어서고 얼마 안 있어 장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리지만 아직 달빛이 다 사위지 않았는데도 뒤꼍은 거뭇한 기운이 자욱하다. 이때 조무래기 가운데 누군가 눈을 비비며 방문을 나서는데 곧바로 나무울타리를 따라 돌며 외쳐댄다. "후여~후우여~" 이른바 새를 쫓는 소리다. 여기서 새란 곡식을 축내는 참새 등 조류를 가리키지만 부정한 기운을 뜻하는 '사(邪)'를 물리치려는 중의(重意)적 기원행위이기도 하다.
새를 쫓기에 앞서 부럼을 깨는 것도 비슷한 바램이다. 한자로 고치지방(固齒之方) 혹은 작절(嚼癤)이라고 해서 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본디는 사기(邪氣)로 하여금 부럼의 딱딱한 껍질을 깨는 소리에 놀라 도망치게 하려는 의도다. 부럼으로 하는 폭죽놀이 효과다. 부럼으로 쓰이는 것은 호두, 잣, 밤, 은행, 땅콩 등인데 죄다 껍질이 세 겹인 이른바 '삼피과(三皮果)'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던 까닭이기도 하다. 조반(朝飯)은 설날 남겨둔 흰 가래떡을 썰지 않은 채 한 뼘 크기로 쪄서 간장에 찍어 먹는데 몸과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고 장수하길 기원하는 절식(節食)이다. 이와 함께 밥을 김에 싸서 '복쌈'을 먹었고 애 어른 할 것 없이 청주(淸酒)로 된 귀밝이술을 마셨다.
복쌈은 먹기 전에 따로 조그맣게 지어 두었다가 나중에 개울물에 던졌는데 물고기 밥(어부슴ㆍ魚鳧施) 삼아 액(厄)을 보내는 거였다. 이 때 짚으로 만든 조그마한 제웅을 함께 띄워 보내기도 했다. 이날 꼬맹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더위를 팔러 다녔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름을 불러 대답을 하면 "내 더위 사가라!"고 외치는 방식이었다. 만일 상대가 대답 대신 거꾸로 "내 더위 사가라"고 하면 도리어 그 사람의 더위까지 옴팍 뒤집어쓰는 장사(?)여서 서투른 놈은 흥정실패가 마냥 서러워 울음보를 터뜨리기 일쑤였다. 이웃집 꼬마한테 실패하고 동생한테 더위를 팔았다가 혼나는 건 다반사였고.
#대보름날엔 특히 금기(禁忌)도 많아 오전엔 마당을 쓸면 복이 쓸려나간다고 못 하게 했고, 칼과 낫, 도끼 등 날이 선 농구(農具)를 쓰면 연중 베거나 다치는 줄 알았다. 또 이날 김치를 먹으면 가려움증에 걸리고 벌과 쐐기에 쏘인다고 믿었고, 머리를 감으면 부모상을 당한다고 여겨 못 하게하고 빗질조차 금했다.
농사에 긴요한 소는 생구(生口)라 하여 식구에 버금가는 대접을 한 까닭에 따로 밥상을 차려준 반면, 개는 이날 꼬박 굶기는 게 풍속이었다. 이날 개한테 밥을 먹이면 파리가 들끓고 비실비실 마른다는 믿음에서였다. 여기에서 남들이 형편 좋을 때 별 볼 일없는 경우를 비유하는 '개 보름 쇠듯'이란 속담이 생겼다.
#대보름날 가장 들썩이던 곳은 척사(擲柶·윷놀이)대회가 열리는 방앗간 앞 공터였다. 대개 마을청년회 주관으로 설날 직후부터 열리는데 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러져 이날 최종 우승자가 가려지니 열기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64강전부터 시작하는 건 보통이고 다른 동네 사람들까지 많이 참가할 경우 판수가 곱으로 늘어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참가자는 주최 측이 발행한 표를 산 뒤 경기 때마다 제출해 지면 찢어버리고 이기면 도장을 받아 다음 승부에 나서는데 도장이 서너 개 찍힌 표는 제법 고가에 거래되기도 했다. 상품으론 농사에 필요한 낫이나 호미, 괭이는 기본이고, 빨래 비누, 냄비, 밥주발 등 안식구용 물품은 물론 나중엔 라디오 등 가전제품도 마련됐다. 말을 잡고, 잡히고 엎치락뒤치락 할 때마다 탄성이 터지고 훈수꾼들의 손짓과 목청이 커지면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판이 기울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악말을 써서 뒤집는가 하면 상대의 마지막 말이 종착역인 '참먹이'에 도착해 있는 마당에 한꺼번에 네 모와 윷, 걸을 내고 순식간에 판을 끝내는 기적을 연출할 때면 그야말로 공터 전체가 열광의 도가니로 변해버리곤 했다.
#척사대회 윷놀이 판 우승자가 결정돼 열기가 식을 때쯤이면 이미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게 마련이고, 이어 대보름 명절의 하이라이트인 '불의 제전'이 온 마을에서 펼쳐진다. 벌판을 덮고 있는 논마다 아이들이 불깡통을 돌리며 괴성을 지르고, 불이 붙은 논두렁들은 성난 황룡마냥 연기와 함께 꿈틀거린다.
마을에선 아직 보름달의 상투도 볼 수 없는데 뒷산 봉우리에선 "야호~" 하는 청년들의 달마중 고함이 터지며 청솔가지 등을 쌓아올린 달집에 거센 불길이 타오른다. 가만히 보니 한군데가 아니라 능선을 따라 서너 곳이나 된다. 매년 대보름이면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총각은 장가들기를, 무자식 부부는 자식 점지를, 수험생은 합격을 각각 달님께 빌었다. 마을에선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린 것들을 데리고 미리 준비해둔 횃대에 불을 붙여 대보름달을 향해 '다님절'을 하며 건강과 소원을 빌었다.
'다님절'은 '달님절'이 변한 말로 "다님, 다님 비옵니다~"하고 소원을 비는 절인데 잘 마른 쑥부쟁이 등을 조대와 함께 나이 수만큼 테를 묶어 횃대를 만든 다음 불을 붙여선 달을 향해 위아래로 흔들며 꾸벅꾸벅 하는 절이다. 횃대가 거의 다 타내려오면 끄트머리를 땅에 모아 북어 대가리를 구워 먹는다.
불내가 매캐하고 검댕이 칙칙하기 짝이 없는 북어대가리를 씹노라면 께름직하지만 영검스런 대보름달에다 축사(逐邪)의 상징인 북어의 힘까지 보태 자손들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하려는 정성이 눈물겨울 따름이다. 이날 불놀이의 마지막은 지난 겨울동안 날리던 연에 액(厄)을 실어 날려 보내고 애 어른이 사용하던 모든 윷가락도 태워 없애는 일이었다. 이러 저러 밤이 이슥하도록 놀다 자정이 가까워오면 하나 둘 집으로 향하는데 못내 아쉬운 표정들이지만 어쩌랴, 자기 전 잣 불을 켜 운수를 살펴보는 것으로 대보름날을 마감하는 수밖에. 지금도 눈에 삼삼한 정월대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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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