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 淸에 끌려간 포로 60만명의 불운
병자호란때 인구6% 잡혀가 … 부패 관료는 첩의 딸 데려온다며 무턱대고 몸값 올려 대부분의 양민들은 피눈물…조정서 데려오면 공노비로 써 현지 남는다는 자청 속출
『왕을 참하라!』(백지원 지음, 진명출판사)란 책이 있다. 재미 사학자가 "백성 편에서 본 조선통사"를 표방하며 썼는데 학계에서의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아니 평가 자체가 아예 이뤄지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겠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지 싶은데, 비어와 속어가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등장하는 등 '파격적인' 서술 방식도 큰 몫을 차지한다. 하지만 통상의 역사서에선 만나기 힘든 흥미로운 사실과 시각이 넘쳐나 볼 만하긴 하다.
그중 병자호란을 다룬 장 중에 '청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60만과 개 같은 조선'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삼전도의 치욕'으로만 기억되는 이 전쟁으로 수많은 조선인이 후금으로 끌려갔다. 교과서에는 김상헌과 삼학사 등 벼슬아치들의 이름만 나오지만, 『병자록』에 따르면 6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부족한 인력을 메우고, 몸값을 받기 위한 전승국의 전리품이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임진왜란으로 700만~80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가 인조 20년에야 1,000만 명으로 회복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전 백성의 5~6%가 포로로 끌려간 참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끌려가는 와중에, 또 만주에 가서 조선인 포로들이 겪은 고초야 이루 말할 것이 없었으니 남은 가족들은 이들을 속환(贖還)하기 위한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책에는 이 대목에서 김류(金瑬)란 고관이 등장한다. 그는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인데 전쟁 중에는 도체찰사였다. 그는 첩의 딸이 포로로 끌려간 것을 알자 역관(譯官) 정명수에게 몸값으로 은 1,000냥을 내겠으니 돌아오도록 주선해 달라고 매달렸다. 아비로서는 이해할 만한 행위였으나 문제는 막대한 속환금의 후폭풍이었다.
책에 따르면 당시 쌀 한 석이 닷 냥이었으니 은 1,000냥은 쌀 200석에 상당하는 돈이었다. 지은이는 "당시 좋은 군마 한 필 값이 30~40냥이었는데, 1,000냥을 내겠다는 미친 놈 하나 때문에 포로의 몸값이 수십 배로 뛰었다"고 했다. "반정공신에다 영의정이니 그간 해 처먹은 돈이 많은" 김류에겐 1,000냥이 별것 아닌 돈이었겠으나, "이 싸가지 없는 인간"으로 인해 50~60냥이었던 몸값이 두당 수백 냥으로 오르는 바람에 보통 사람들은 껑충 뛴 포로 속환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설명한다. 이른바 '지도층'의 처신이 미치는 사회적 영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뒷이야기가 있다. 조선 조정에서도 몸값을 내고 포로를 사오긴 했는데, 이게 희한한 것이 나라에서 사오면 돌아온 포로는 공노비가 되어야 했단다. 나랏돈으로 샀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는데 이 때문에 차라리 청나라에서 살다 죽겠다는 포로도 많았다고 한다. 지은이가 이 글의 소제목을 '~개 같은' 조선이라 붙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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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