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훈의 세상만사]② 나혜석 결혼 때 공개 청첩장 첫 등장
1920년 여류화가와 변호사 김우영의 가연소식이 동아일보 광고란에 실려 여론 좋지 않아 "천벌 받아 죽을 놈","미친년 따로 있었네"등 반응 싸늘해
# '가을 하늘 공활(空豁)한데 높고 구름 없이.'
애국가의 가사마냥 참 하늘이 높고 푸른 게 시원하니 좋다. 텅 비어 매우 넓다는 뜻인 '공활'이란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선선한 기운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저 넓은 하늘이 쪽빛으로 쨍할 테다.
흔히 가을을 일러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한다. 어릴 적부터 수없이 들어온,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맑고 풍요로운 가을 날씨를 비유한 뜻이 무엔 지 그럴싸하다.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면 오곡뿐만 아니라 냇가에서 소곤소곤대던 처녀 총각도 결실(結實)을 한다. 자고로 결혼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이다. 이 '큰 일'을 좋은 철에 치르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철이 철이니만치 하루가 멀다 하고 결혼 청첩(請牒)이 날아든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하다보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이들의 경사(慶事)인지라 기쁜 마음으로 열어보곤 한다. '첩(牒)'자는 '반으로 잘라놓은 나무'의 상형과 '나뭇잎'의 상형이 어우러진 글자로 문서나 편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청첩(請牒)'은 결혼 따위의 좋은 일에 남을 초청하는 글발이요, 청첩장은 그런 내용이 적힌 종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결혼식에는 청첩이라는 것이 없었다. 맨 먼저 사당(祠堂)에 가 조상님들한테 "제가 누구와 혼인합니다." 하고 고(告)하는 것이 결혼의 첫 단계였으니까.
청첩은 신식 결혼식, 즉 지금과 같은 기독교식 결혼식이 늘어나면서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결혼청첩은 1920년 4월 10일자 동아일보 광고란에 실린 여류화가 나혜석(羅蕙錫)과 변호사 김우영(金雨英)의 공개 청첩이었다.
'敬啓者 生等은 牧師 金弼秀氏의 指導를 隨하여四月十日(土) 下午三時에 貞洞禮拜堂에서 結婚式을 擧行하옵나이다. 伊日에 尊駕 枉臨의 光榮주심을 伏望. 庚申四月三日 金雨英 羅蕙錫'
이 청첩은 "천벌을 받아 죽을 놈" "미친년이 따로 있었구나." 등등 장안 일대에 큰 화제 거리가 됐다. 신식 결혼이 생긴 뒤에도 사회분위기는 여전히 몸 둘 바를 몰라 했던 터라 '내가 모월 모일 모시에 모처에서 누구와 혼인합니다.'하고 미리 알리는 청첩장을 전달하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때였기 때문이다.
# 우리나라에 서구식 혼인의례가 도입된 건 기독교의 전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결혼식은 1888년 3월 14일 수요일 저녁 서울 정동교회(한국개신교 첫 교회)에서 아펜젤러(H.G Appenzeller) 목사의 주례로 열렸다. 신랑은 국내 최초의 관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양반 자제를 입학시켜 통역관을 양성하는 동문학(同文學· 1883년 8월 1일 설립)의 학생 한용경이었고, 신부는 과부 박 씨였다.
또 한국 최초로 신부가 면사포를 쓴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892년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황 씨와 배재학당 남학생의 혼인식에서였다. 당시 신부는 흰색 치마저고리에 면사포를 착용했고, 신랑은 프록코트를 입고 예모를 썼다.
# 1960년대만 해도 시골에선 대부분 전통방식으로 장가들고 시집갔다. 필자가 처음 신식 결혼식을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66년. 서울 청량리의 한 예식장에서 거행된 사촌 큰 누님의 혼인 때였다. 동네에서 맨날 '구식 결혼'만 보다가 모처럼 서울까지 가서 보아서 그런지 너무나 생경하면서도 신선해 그날의 장면들이 지금껏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집안 형뻘인 지역 국회의원의 주례로 진행된 결혼식에는 우리 동네(면)는 물론 군내 웬만한 유지들은 거의 참석해 청량리 일대가 우리 손님들로 북적거릴 정도였는데, 당시 서른이 넘어 노처녀로 꼽혔음에도 드레스를 입은 누이가 얼마나 곱고 예뻤는지….
당시 결혼식은 사회자의 개식선언에 이어 ‣신랑입장‣신부입장‣신랑신부 맞절‣혼인서약‣성혼선언문 낭독‣주례‣양가 부모와 내빈에 대한 인사‣신랑신부 행진 및 퇴장 순으로 이어졌다.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예식장 안은 시종일관 엄숙한 분위기여서 신랑신부를 향해 농담을 하거나 옆에 들릴 정도로 떠들고 웃는 소리가 일절 없었다. 요즘 으레 빠지지 않는 축가와 케이크 절단, 부케 전달 같은 것은 물론 없었다. 비록 형식과 절차는 신식으로 따르지만 혼례 전통의 신성·엄숙함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결혼식의 이 같은 분위기는 핵가족화가 가속되고 자녀수마저 단출해지면서 1980년대 들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해 요즘엔 신성과 엄숙은커녕 즐거운 분위기를 넘어 '장난판'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비일비재한 실정이다.
예식을 주관하던 주례가 없어진 것은 그렇다 치고, 그 역할을 신랑아버지가 하고, 신부아버지도 뒤질세라 '덕담'이라는 명분으로 '주례사'를 해댄다. 주례가 시답지 않다며 없앤 게 외려 두 명으로 늘어난 셈이니 하객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을 수밖에. "왜 지들 집안에서 해도 될 말을 손님들을 불러놓고 주접을 떠냐?"는 불평이 곳곳에서 터진다. 이건 분명 무례다. 더욱 꼴불견은 성혼(成婚)선언마저 신랑아버지가 하는 것이다. 성혼선언이란 신랑과 신부가 여러 하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인서약을 했다는 것과 이를 통해 하자 없이 부부가 됐음을 공증(?)선언하는 것인 만큼 제 3자가 하는 게 상식인데 말이다. 이러니 나이가 지긋한 집안 어른들하며 머리 허연 제 부모 친구들이 보건 말건 아랑곳 않고 키스를 시키고, 또 하고… 멋대로 짓거리를 펼친다. 하기야 말이 신혼이지 진즉에 볼 거 다 보고, 할 거 다 했으니 그럴 법도 하리라만, 해도 해도 너무 무도(無道)한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혼을 식은 죽 먹기보다 쉬이 여기는 게 다 이런 까닭에서 일 테다. 박기 수월하면 빼기도 수월한 법이니까.
#예전엔 결혼하면 으레 '백년해로(百年偕老)'란 말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결혼식 주례사에선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이란 관용구와 함께 거의 빠짐없이 등장하곤 했다.
이혼을 밥 먹듯 하는 요즈음 이런 담론이 가당키나 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결혼할 때만큼은 신랑과 신부 다 이런 마음이 아닐까?
'머리 묶어 부부 되어 잠자리 같이 했으니(結髮同枕席)/황천까지 함께 벗하리라(黃泉共爲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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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항공사에 다니다 1982년 중앙일보에 신문기자로 입사했다. 주로 사회부,문화부에서 일했다. 법조기자로 5공 초 권력형 비리사건인 이철희ㆍ장영자 사건을 비롯,■영동개발진흥사건■명성사건■정래혁 부정축재사건 등 대형사건을, 사건기자로 ■대도 조세형 사건■'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유명한 탄주범 지강현사건■중공민항기사건 등을, 문화부에서는 주요무형문화재기능보유자들을 시리즈로 소개했고 중앙청철거기사와 팔만대장경기사가 영어,불어,스페인어,일어,중국어 등 30개 언어로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엔 초짜기자임에도 중앙일보의 간판 기획 '성씨의 고향'의 일원으로 참여하고,1990년대 초에는 국내 최초로 '토종을 살리자'라는 제목으로 종자전쟁에 대비를 촉구하는 기사를 1년간 연재함으로써 우리나라에 '토종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밖에 대한상의를 비롯 다수의 기업의 초청으로 글쓰기 강의를 했으며 2014인천아시안게임 대변인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