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철의 X파일] ⑧ 실격이란 좌절 딛고 일어선 박태환

도하 아시안 게임 MVP에 이어 2007년 멜버른 세계 수영 선수권 처음 금메달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 하나씩 따내 5천만 국민들 열광 수영선수론 단신이어서 1m 98cm의 쑨양도 박태환 선수를 자신의 롤모델로

2024-05-28     최동철 이코노텔링 편집자문위원장

박태환 선수입장에서 보면 국가대표로서 첫 출발은 충격적이다. 중학교 3학년 시절에 국가대표 선수로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경기도 못해보고 출발선에서 실격을 당했으니 말이다. 사춘기였던 박태환 선수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엄청난 사건이었다. 선수라면 누구든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 출전이 꿈이고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며 가문의 영광이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도 PGA 투어에서 82승으로 최고의 기록을 갖고 있지만 올림픽 출전을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고 술회했다. 올림픽 출전과 메달리스트는 전세계 올림피언들의 공통된 꿈이다.

박태환은 아테네 올림픽 실격으로 화장실에서 30분간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하지만 그 시련을 딛고 2년간 절치부심끝에 마침내 우리나라 스포츠 사상 온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되는 마린보이로 재탄생했다.

2006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 MVP에 이어 2007년 호주 멜버른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하나씩 땄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은메달 소식은 5천만 국민들을 열광케 했다. 말 그대로 영웅의 탄생이었다.

박태환 선수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아시아의 물개라는 조오련 선수와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 선수의 아시아 수영대회에서 최고 기록이었지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은 아예 염두도 두지 않았었다.

마린보이라는 애칭과 함께 그 당시 떠오르는 피겨의 김연아 선수와 국민 남매라는 새로운 애칭으로 전 국민의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되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영웅이 됐다라는 얘기가 있듯이 박태환 선수는 국민 영웅이 되었다. 박태환 선수 당시 나이가 19살 였을 때였으니 세상 모든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될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때였다.

모든 언론은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앞다투어 대문짝하게 다루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박태환 선수를 광고모델로 모셔가기 위해 다투었다.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는 SK그룹과 엄청난 후원 계약금으로 4년 계약을 맺었다. 스포츠 스타에서 스포츠 재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예와 부를 갖게 되었다.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는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했다. 세계 수영계가 박태환 선수를 다른 세계적인 선수보다 관심을 둔 이유는 183cm의 단신에도 불구하고 세계정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수영은 신장이 큰 선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중국 스포츠 팬들의 절대적인 스타였던 신장 1m 98cm의 쑨양선수도 박태환 선수를 자신의 롤모델로 생각했을 정도로 마린보이 박태환 선수야말로 명실상부 세계적인 수영스타였다. 그러나 박태환 선수는 3년간 세계적인 수영스타로 명예와 부를 누렸지만 2009년부터 내리막 길을 걷게 된다. 이 얘기는 다음주에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