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의 역사갈피] 지학(止學)의 처세술

멈춤(止)과 멈추지 않음(不止) 사이가 성공과 실패의 분수령 멈춤의 지혜 없으면 '큰 일 이루지 못하고 낭패' 교훈 새겨야 원나라 세조 때 상가(桑哥), 주변 충고 안듣고 독주하다 자멸

2024-04-23     이코노텔링 김성희 객원 편집위원

중국 수나라 양제(재위 604~618) 때 활동한 왕통(王通)이란 유학자가 있다. 그는 황제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은 채 제자를 키우고 글을 쓰는 데 몰두했다.

중국 역사상 손꼽히는 태평성세인 당 태종의 '정관의 치'를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운 위징, 방현령, 이정 등 명신과 명장이 그의 제자이니 그의 가르침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남긴 문집 『문중자(文中子)』 10권에는 멈춤(止)과 멈추지 않음(不止) 사이가 성공과 실패의 분수령이자 큰일을 이루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경계라는 독특한 깨달음이 담겼다.

중국의 고전연구가 마수취안이 『문중자』의 명구를 가려 뽑고 중국사에서 관련된 예화(例話)를 붙여 현대인을 위한 처세술 교본을 냈으니 그것이 『지학(止學)』(김영사)란 책이다. 그중 "세력이 지극한 데도 양보하지 않는 자는 의심받고, 지위가 존귀한 데도 공손하지 않은 자는 기피된다(勢極無讓者疑 位尊弗恭者忌)"란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마수취안은 이를 두고 "역사는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며 원나라 세조 때 상가(桑哥)의 예를 보여준다. 황제의 총애를 믿은 상가는 자기와 가까운 사람만 등용하면서 관직까지 팔아 먹었다. 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과실이 있어도 형벌을 내렸고 심지어 무고한 사람들까지 감옥에 가두는 일이 허다했다.

한 번은 양거관이란 관리의 허물을 잡아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를 두고 상가의 벗이 "권세를 믿고 방종하면서 멋대로 일을 처리하면 하늘의 분노를 사고 백성의 원망을 사게 된다"며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고 충언을 했다. 그러자 상가는 "관리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위세가 있어야 합니다. 세력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두려워하겠습니까?"라며 권세를 휘두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상가의 아내가 사소한 일로 사람을 마구 죽여 더 많은 원수를 만들지 말고 너그러움을 보이라고 하자 상가는 "나를 따르는 자는 번성하고 나를 거스르는 자는 멸망한다. 그것이 내가 만든 법이다. 곧 죽을 사람들이 나를 욕한들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큰소리쳤다.

몇몇 아첨꾼들이 상가의 공덕비를 세우려 하자 그의 친 ㅊ구들은 "당신은 이미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는데 황제께서 들으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스스로 신중하면서 자신을 감출 줄 모른다면 일은 엇나가기 마련입니다"라며 공덕비 세우는 것을 만류했다.

그러나 잘 나가던 상가는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으니 그의 말로는 뻔했다. 세조의 눈에 크게 벗어나면서 조정의 백관들이 들고 일어나 상가의 죄상을 일일이 고했기에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총선 결과 득의한 사람, 영락한 사람이 여럿 나왔다. 그러나 처지가 어떻든 이 『지학』을 한 번쯤 읽어두는 것이 무용하지 않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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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