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점연재] 정주영 히스토리 ⑲ '나는 봉이 아니다'
쌀집 할머니를 둔 기자의 '특권' 업고 청운동 자택서 정주영 대한체육회장과 단독 기자회견 재벌집 아침밥상 단출해 내심 놀라…여기저기서 지원요청 쇄도상황 상정하자 불쾌한 표정
재계의 거물이 체육회장이 됐으니 언론계 역시 부산하게 움직였다. 각사 체육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현대그룹 차원에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갑자기 체육회장을 맡은 거라서 조금 준비할 시간을 가진 뒤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얘기였다.
다음 날 편집회의를 마치고 나온 부장이 나를 불렀다. "정 회장 인터뷰할 기자는 이민우밖에 없다. 인터뷰해서 기사 갖고 와." 부장의 이 말은 다분히 할머니를 의식한 거였고, 나 역시 믿는 구석은 할머니밖에 없었다.
퇴근 후 나는 할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내일 아침 청운동에 함께 인사하러 가자"고 졸랐다. 할머니는 "정 회장은 새벽 같이 일어나니 가려면 일찍 가야 한다"라고 했다.
나는 할머니를 모시고 7월 14일 새벽 5시에 청운동 자택 인터폰을 눌렀다. "쌀집 할머니"라는 말에 일하는 아주머니가 금방 문을 열어줬다. 말로만 듣던 '쌀집 할머니 통과'를 직접 목격한 순간이었다. 변 여사가 정갈한 차림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할머니가 "우리 손자가 체육부 기자라 인사하러 왔다"라고 하자 변 여사는 "회장님이 일찍 출근하시니까 이 시간에 오길 잘하셨다"며 근황을 물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방에서 부스럭부스럭 신문 들추는 소리가 나더니 5시 30분쯤 정 회장이 나왔다. 인사를 주고받은 후 정 회장이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고 했다.
현대그룹 회장의 아침 식사는 어떨까 내심 기대를 많이 했다가 깜짝 놀랐다. 순두부찌개와 멸치볶음 등 반찬 서너 가지가 전부였다. 우리 집 식단보다 형편없었다.
마침 손자 두 명(어렸기에 누구였는지는 모르겠다)이 있었다. 변 여사는 손자들에게 "얘들아, 인사드려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젊었을 때 이 할머니에게 신세를 많이 졌단다"라며 할머니를 소개했다.
식사 후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현대 회장이 체육회장이 되셨으니 여기저기서 지원을 많이 해달라고 할 텐데"라고 운을 띄우자 "나는 봉이 아니야"라며 불쾌해했다.
정주영 회장의 단독 인터뷰가 중앙일보에 나오자 타사들은 난리가 났다. 특종의 쾌감은 기자만이 갖는 특권 중 하나다. 정 회장 단독 인터뷰는 순전히 할머니 덕분에 건진 특종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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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텔링 이민우 편집고문■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한일보와 합동 통신사를 거쳐 중앙일보 체육부장,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4년 LA 올림픽, 86 서울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 90 베이징아시안게임, 92 바르셀로나올림픽, 96 애틀랜타올림픽 등을 취재했다. 체육기자 생활을 끝낸 뒤에도 삼성 스포츠단 상무와 명지대 체육부장 등 계속 체육계에서 일했다. 고려대 체육언론인회 회장과 한국체육언론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 총장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