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이 엮은 인류경제사] ⑯ 튀르키예 비단의 운명
6세기경 페르시아 두 승려가 대나무 지팡이에 누에 알과 뽕나무 씨를 넣어 훔쳐와 중국의 비단직조 기술 비잔틴 전파…9~12세기에는 튀르키예 비단,유럽수요 감당 오늘날 이탈리아는 중국과 튀르키예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실크를 생산해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Arnold J. Toynbee 1889~1975년)는 일찍이 '이스탄불은 인류 문명이 살아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고 평했다.
튀르키예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은 물론 튀르키예는 곳곳에 인류의 오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니 전국이 귀하고 거대한 박물관임이 분명하다.
튀르키예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인류 문명이 시작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찬란한 역사가 시작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이스탄불로 옮긴 서기 330년부터다. 로마 제국이 392년 동서로 나뉘고,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와 달리 동로마는 1453년까지 장장 1000년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꽃피웠다. 이 시기에 동로마 제국의 영화와 더불어 세계인의 의복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비단이 그랬다.
이스탄불은 지리적으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접점 지역으로 동방과 서방의 문화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당시 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던 중국의 도자기나 비단이 이스탄불을 통하여 유럽으로 전파됐다. 그 무렵 중국의 비단은 유럽에서 '꿈의 직물'로 불리었다. 비단과 금이 같은 무게로 거래될 정도였다고 하니 유럽인들의 비단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된다.
비단은 화려하고 무늬도 아름다울 뿐더러 특수 조직으로 짜여 있다. 다른 직물과 비교하기 힘든 특유의 품위와 우아함, 그리고 무게감이 있다.
한편으로는 비교적 두꺼워서 계절이나 지역에 따라 의복 재료로서 한계가 있었다. 튀르키예는 값비싼 비단의 양을 늘리고 보다 얇은 비단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스탄불 직조공들이 중국의 비단을 다 풀어 낸 뒤 얇게 다시 본래 비단처럼 짜내었다. 놀라운 직조 기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중국과 같은 비단을 생산해내진 못하였다. 바로 누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누에가 만들어내는 실크를 능가하는 섬유는 없다. 비단 특유의 광택이나 옷자락이 스칠 때 나는 비단의 소리는 현대 과학으로 풀 수 없는 신비 중의 하나이다. 1940년 나일론 개발을 시작으로 여러 종류의 화학섬유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어떤 인조섬유도 천연 실크의 품위와 우아함을 지닌 섬유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현대 과학과 우수한 두뇌들이 이 시간에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 일찍이 누에를 기르고 거기서 실을 얻어 비단이라는 경이로운 직물을 짰던 중국은 이 신비의 기술이 다른 나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보안을 철저히 하였다.
비단 직조의 비밀을 외부로 누출시키는 사람을 사형으로 다스리며 실크 제조업을 육성 발전시켰다. 덕분에 중국은 수 천 년간 비밀스럽게 지킨 실크 산업을 통해 국부를 증대시켰다.
서양에서 비단에 대한 갈증을 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은 6세기경 비잔티움제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이다. 중국에서 그렇게도 철통 같이 외부 유출을 차단했지만, 결국 죽음을 무릅쓴 시도가 성공했다. 페르시아의 두 승려가 대나무 지팡이에 누에 알과 뽕나무 씨를 넣어 훔쳐온 것이다. 이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황실에서 누에를 키우고 뽕나무 재배에 성공하고, 마침내 비단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9세기~12세기에는 튀르키예 비단이 유럽의 수요를 감당할 만큼 발달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실크를 직조하게 된 것은 9세기경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뽕나무가 전파돼 재배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곳은 비잔틴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비교적 쉽게 뽕나무 씨나 누에 알이 비잔틴에서 건너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유럽 실크산업은 12세기경부터는 이탈리아도 주요 실크 생산국 반열에 오르도록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이탈리아는 실크 생산을 꾸준히 발전시키며,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실크를 생산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중국도, 튀르키예도 '실크 생산의 왕좌'를 이탈리아에 내주게 된 것이다.
대지진으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막심한 가운데 치러진 선거에서 에르도안이 2차 결선투표 끝에 승리해 3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에르도안 정부가 빛을 잃어가는 튀르키예 비단을 비롯한 문화유산을 지키고 발전시키는데도 특별한 관심을 가져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