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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②1920년대의 악몽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 ②1920년대의 악몽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12.19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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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대전 중 일본은 미국에 이어 무기 수출 2위국에 오르는 등 ' 벼락부자 ' 시대 구가
유럽이 재기에 나서고 중국의 반일감정 깊어지면서 수출이 줄어들자 주가폭락에 뱅크런

일본에게 1920년대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시대일 것이다. 전쟁 때는 좋았다. 유럽에서 터진 전쟁특수(特需)는 일본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였다. 전쟁이 끝나도 꽤 오랜 동안 호황이 계속될 줄 알았다. 유럽의 부흥은 늦고 중국시장은 커질 것으로 봤다. 하지만 오판(誤判)이었다. 그리고 이 오판은 1920년대 일본이 꾼 악몽(惡夢)의 서막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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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는 잔인하다.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 링 위의 누군가가 "나와 겨룰 자신이 있으면 올라와"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잘못 올라갔다가 두들겨 맞으면 만신창이가 되고 돈도 빼앗긴다. 그럼 가입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그럼 세상은 그를 약자, 후진국으로 본다. 게다가 그런 나라 돈은 돈 취급을 안 한다. 무역과정에서 결제대금으로 쓰이지 못한다. 그러니 "우리는 강하다"거나 "우리는 강국"이라고 생각하는 나라는 어쩔 수 없이 링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싸워야 한다. 박 터지게!

링 위로 올라갈 것이냐 말 것이냐. 이 결정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내부 구성원들 간에도 이해관계가 다르다. 세계를 무대로 뛰는 재벌ㆍ대기업은 오르자 할 테고 내수를 중시하는 중소ㆍ영세기업은 오르지 말자고 할 것이다. 정치권도 갈린다. 금본위제는 재정을 긴축하고 이 '긴축'에는 군사부문도 꼽힌다. 경제강국을 원하는 이들과 군사강국을 원하는 이들과의 대립도 만만치 않다. 1929년 일본은 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금본위제를 도입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야말로 나라의 명운이 달린 결정이었다.

일본어로 ‘벼락부자’란 뜻의 ‘나리킨(成金)’을 풍자한 만평. 어두운 곳을 밝히기 위해 돈을 태운다는 의미.
일본어로 '벼락부자'란 뜻의 '나리킨(成金)'을 풍자한 만평. 어두운 곳을 밝히기 위해 돈을 태운다는 의미.

지난 회에 인용했던 하마구치 오사치(浜口雄幸) 총리의 연설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자. 연설 날짜는 1929년 6월 5일이었다. 이날 총리는 "증권시장은 거의 대공황에 함몰돼 있으며 일반 거래도 한층 위축됐다"고 했다. 분명 '대공황'이란 용어를 썼다. 필자가 의역한 게 아니다. 원문을 보면 "大恐慌に陷り(だいきょうこうにおちいり)"로 돼 있다. 세계 대공황을 일으킨 미국의 주가 폭락은 1929년 10월의 일이다. 하마구치 총리의 연설은 대공황이 터지기 4개월 전 일이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 세계대공황 이전부터 일본은 대공황 중!

그렇다. 일본은 미국의 주가폭락과 그것에서 비롯된 세계대공황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대공황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게 1920년대는 무척이나 힘들고 괴로운 시절이었다. 버블 붕괴와 함께 '잃어버린 10년' 소리를 듣던 1990년대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같은 시기 전후 대호황을 겪었던 미국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몰아닥친 이른바 1920년의 전후(戰後)공황, 1923년의 간토(關東)대지진, 1927년의 쇼와(昭和)금융공황 등 몇몇 대사건의 나열만으로도 우리는 1920년대 일본의 위기상황을 읽을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정말 잘 나갔다. 전장(戰場)인 유럽에 물건을 대줄 나라가 많지 않았다. 무기도 팔았고 농산물도 팔았다. 이 무렵 일본은 미국에 이어 무기수출 2위국이 됐다. 면(綿)시장에서도 일본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다른 나라들은 면사(綿絲)나 면직(綿織)을 만들 겨를이 없었다. 배를 만들고 나르고 하는 일들도 일본이 맡았다. 조선과 해운업이 급속도로 성장했던 배경이다. 워낙 돈을 많이 벌다보니 이때를 가리켜 일본은 '벼락부자'라는 일본어 '나리킨(成金)'을 써 '나리킨의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였다. 1918년 전쟁이 끝났다. 그럼 호황도 끝난다. 하지만 돈에 취한 일본이었다. 호황이 더 오래 갈 것이라 판단했다. 유럽이 산업적으로 회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봤고 중국시장은 여전히 확장일로에 있을 것으로 여겼다. 일본 기업들은 '호황'에 베팅했다. 생산에 더 많이 투자했고 주가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추후 밝혀졌지만, '거품'이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 2년 가까운 이 호황기를 일본경제학자들은 당시 천황의 이름을 따 '다이쇼(大正) 버블'이라 이름 붙였다.

버블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유럽의 재기(再起)가 일본의 예측보다 빨랐다. 게다가 중국에서 일본 제품을 파는 것도 어려웠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태로 중국 내 반일(反日) 감정이 급속도로 커진 탓이었다. 생산과 수출이 줄고 재고와 적자가 늘고 있었다. 이 같은 경영환경 변화에 가장 예민한 것이 주식시장이다. 1920년 들어 주춤거리던 주가가 3월 들어 폭락을 시작했다. 폭락이 본격화된 4월부터 3개월 동안 주가는 반 토막에서 1/3토막까지 떨어졌다. 150개 이상의 전국 각지 은행에서는 뱅크런(Bank Run) 현상까지 일어났다

1920년대 일본경제에 치명상을 간토대지진 직후 모습.
1920년대 일본경제에 치명상을 일으킨 간토대지진 직후 모습.

1920년의 공황이 일본경제에 준 상처는 컸다. 기업과 은행이 줄도산 했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멀쩡할 리 없었다. 기업들은 비정상적인 경영을 이어갔다. 분식회계와 횡령이 난무했다. 건강한 기업문화까지 무너져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경제의 소생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힘겨운 불황은 이후 2년여를 갔다. 일본의 1920년대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시작했다. 악몽(惡夢)의 시작이었다.

불행은 한꺼번에 오거나 아니면 꼬리를 물고 온다. 1920년대 초 일본도 그랬다.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에 더 큰 재앙이 닥쳤으니 이게 바로 '간토(關東)대지진'이었다. 간토대지진은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그 영향이 일부 지역에 그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도 그랬다. 일본 전체에, 그리고 오랫동안 고통을 줬다. 간토대지진은 바로 이런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시작은 1923년 9월 11일 일본의 수도 도쿄(東京) 인근에서 터진 진도 7.9~8.3의 엄청난 대지진이었다. 7분 정도 이어진 지진은 일본 간토지역을 초토화시켰고, 일본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공포의 시간을 맞게 된다. 하지만 지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 이틀 동안 간토지역에서만 규모 6 이상의 여진이 무려 15번이나 터졌다. 대지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또 다른 대지진이 들이닥치지나 않을지 노심초사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조선인 대학살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피해 규모도 상상을 뛰어 넘는다. 피해 인구수는 340만4898명. 이중 절반이 도쿄시 소속이었다. 추정치는 다르지만 사망자ㆍ행방불명자도 대략 15만 명 전후나 된다. 건물ㆍ가구ㆍ기계설비 등이 소실ㆍ붕괴ㆍ파손돼 입은 민간피해액도 도쿄시 25억5000만 엔, 요코하마(横浜)시 7억2000만 엔 수준이었다. 1923년 당시 일본 정부의 1년 예산 규모가 대략 13억2000만 엔 정도였으니 당시 피해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정부청사가 있던 지역이어서 국가행정마저 마비될 수밖에 없었다.

기업만 대상으로 한 구체적인 데이터는 없다. 하지만 기업이 입은 피해의 심각성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건물도 무너지고 공장도 창고도 무너졌을 것이다. 보관 중이던 재고의 파괴ㆍ소실도 막중했음을 추정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기에 수출입과 어음 등 금융관계가 파괴됐고 관련기업의 주가폭락도 상상할 수 있다. 자칫 셀 수 없이 많은 기업의 도산으로 증시와 금융 시스템 자체가 파괴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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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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