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관 (김학렬 기획ㆍ 오치성 내무ㆍ 신직수 법무) 해임 건의안 빌미로 작용
"세상 살다 보니 정말 별꼴 다 보겠다. …… 물가는 오르고 생활은 쪼들려서 주부도 남편도 이마에 주름살만 늘어날 형편인데 어느 누가 까불 경황이 있겠느냐 말이다."( 『동아일보』 1971년 9월 20일 자)
'까불면 망한다' 사건은 언론이 쓰루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바로 옆에서 직접 들은 박통은 그 망언을 그렇게 중대한 실언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는 평소 쓰루의 강한 성격과 입버릇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국
'까분다' 망언은 결국 이틀 뒤인 9월 20일, 그를 국회 본회의에 불러냈다. 그는 "내가 말한 국민이란 말은 우리 국민을 특정한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 국민이건 그렇다는 일반론을 이야기한 것"이라면서, "다소 경제가 발전했다고 해서 국민이 사치하고 방심하면 안 된다는 틴베르헌 교수의 개발론을 인용한 것이 물의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한 나라의 부총리나 되는 사람이 까분다는 저속한 용어를 사용했다는 자체가 수양 부족의 소치다"라고 장황하게 사과해야 했다. 이어진 그의 발언이 걸작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는 까분다는 단어는 안 쓰기로 결심했다"며 사과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로 답변을 마쳤다. 여야 할 것 없이 국회 본회의장은 한바탕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국회에서의 해명과 사과의 자리라고 해도, 그의 유머는 억제될 수 없었던 거다.
그것으로 '까분다' 사건은 일단락된 듯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심심찮게 이 '까분다' 사건은 만평이나 가십 등에 빈정거리는 소재로 등장하곤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야당이 국회에 제출한 3장관(김학렬 기획, 오치성 내무, 신직수 법무) 해임 건의안의 한 빌미를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