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이산은 중국인 특히 몽골족에게 성스러운 불교성지이다. 흡사 티벳장족이 천신만고 끝에 라싸의 대소사(조캉사원)를 참배하기 위해 수천리 길을 오체투지하면서 다가서듯 몽골족에게는 그에 버금가는 성스런 산이다.
우타이산과 불교관계에 대해 좀 더 탐색해본다. 원래 우타이산은 도교 수행자의 수련성지였다. 仙經에 “五臺山, 名爲紫府, 常有紫氣, 仙人居之”(오대산은 이름이 자부로 언제나 서기가 서려있고 신선들이 거주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우타이산은 중국에서 뤄양의 바이마쓰 ( 白馬寺 )와 함께 가장 먼저 불교사원이 지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 한가지 두드러진 점은 무엇보다 우타이산의 각종 사원 건축이 보유하고 있는 여러 가지 건축과 조소, 석각, 벽화와 서예 부분에서 모두 높은 예술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가 우타이산에 전래된 것은 일반적으로 동한시기였다고 알려져 있다. 사료에는 영평 10년 (기원 67년 ) 12월 한 명제가 서역으로 가서 구법할 것을 명한 사자가 두 사람의 인도고승과 낙양에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이듬해 이들 두 고승들이 거주하기 위한 절이 건설되었고 바이마寺로 명명되었다. 같은 해 두 고승 중 한명이 뤄양에서 우타이산으로 왔고 이곳에 절을 짓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우타이산은 도교근거지로 불교사원을 지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조정에 상주하여 절을 짓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조정에서는 불교와 도교의 종교로서의 우열과 진위를 변별하기 위해 불교 승려와 도교 도사가 참가하는 종교변론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패배한 종교는 승복의 뜻으로 자신의 경전을 불태우기로 했다. 변론대회 결과 불교의 승리로 끝나고 도교의 경전은 모두 불태워졌으며 불교경전은 온존될 수 있었고 절을 지을 권리도 획득했다. 이때 지어진 절이 바로 지금의 센통쓰(顯通寺) 의 전신인 다푸링주쓰(大孚靈鷲寺)이다. 바로 이시기부터 우타이산은 도교가 아닌 불교성지로 자리매김하며 오랜 시간 중국 불교도의 심중에 성지로 자리잡아왔다. 북위와 북제시절을 거치면서 우타이산의 불교세력은 급격히 확장되었다. 우타이산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곳이 문수보살이 거하는 곳으로 우타이 즉 다섯 봉우리에 모두 문수보살을 공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5개 봉우리에 모두 문수보살을 모시고 있지만 그 법호(명칭)가 달라 아주 흥미롭다.
동쪽 봉우리 왕하이쓰( 望海寺 )에 존봉된 문수보살은 총명문수, 남쪽 봉우리 푸지쓰 ( 普濟寺 )에는 지혜문수, 서쪽 봉우리 파레이쓰 (法雷寺)에는 무구문수, 중간의 봉우리에 있는 엔쟈오쓰 ( 演敎寺 )에는 아동문수가 모셔져 있다. 당왕조 시기 중국불교가 가장 번성했던 시기로 당시 조정은 국가규정으로 전국의 모든 절에 반드시 문수보살상을 공봉하도록 명령했다. 이런 연유로 우타이산은 불교성지로서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달이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당조의 과도한 불교의 흥왕으로 이곳 우타이산에 한때 일만을 헤아리는 승려가 거주하였고, 국가 사회에 정치경제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했고 결국 법란을 불러왔다. 기록에 의하면 대소 사원 44,600여 곳이 철거되고 승려 26만이 환속당했다. 엄청난 사원 소유 토지도 이때 몰수당했다. 우타이산의 불교성지로서의 명성은 중국에만 그치지 않고 인도와 일본, 신라와 고려 그리고 스리랑카의 불교신자와 승려의 순례코스가 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불법을 구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외국승려도 아주 많았다고 한다. 우타이산의 절은 크게 靑廟와 黃廟로 구분한다. 즉 중국(한족) 사원과 티벳사원으로의 구분이다. 티벳불교사원은 전부 티벳불교 겔룩파 ( 황교파 )로 그들의 승복색이 황색이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되었고, 청묘는 중국사원의 승려는 일반적으로 푸른색 혹은 회색 승려복 때문에 이렇게 분류된다. 우타이산의 주요한 황묘 즉 티벳불교사원은 푸사등(菩薩頂), 뤄호우쓰, 광런쓰 등 모두 8곳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