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14:50 (목)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4) '모던 타임스' ⑮ '엔딩 신'의 메시지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4) '모던 타임스' ⑮ '엔딩 신'의 메시지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2.01.24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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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을 견디는 장면서 "노력하면 부자가 된다"라는 '자유로운 신분 상승' 내비쳐
살려고 노력해 봐야 무슨 소용? 물음에 "기운을 내요. 잘 할 수 있다"란 대사 넣어
모호한 엔딩 신은 다양하고 상반된 해석 여지 남겨 오늘날 재해석이 필요한 이유

<모던 타임스>는 '친(親)공산주의 영화'일까, '반(反)자본주의 영화'일까? 둘 모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정도로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화는 한편으로 '친자본주의 영화'라는 해석의 여지도 남겨놓는다. 친공산주의, 반자본주의, 친자본주의. 영화의 엔딩 신은 이 세 가지 해석 모두를 가능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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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스>는 복잡하다. '다층 의미 구조'를 갖는다. 이렇게 보면 이런 것 같고 저렇게 보면 저런 것 같다. 친(親)공산주의 영화?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단정하기는 어렵다. 반(反)자본주의 영화? 또는 자본주의 비판 영화? 이것은 거의 확실하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 그로 인한 노동자의 소외, 극단의 빈부격차 그리고 가난한 서민의 참담한 삶이 영화 전반에 담겨 있다. '친(親)노동 영화'라는 평가는 어떤가? 이 평가에도 적극 동조하게 된다. 영화에는 이 같은 장면과 분위기가 차고 넘친다. 가난하고 힘없고 착한 노동자가 지배받고 감시당하고 처벌된다. 자동 식사 기계의 실험대상까지 된다.

친공산주의, 친노동, 반자본주의, 자본주의 비판 등의 성격을 갖는 영화라는 <모던 타임스>에 대한 비평가에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하지만 이게 끝일까? 그럼 그나마 간단할 텐데···.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의 성격과 전혀 다른, 또는 반대의 성격을 갖는 영화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친자본주의 영화. 이런 평가도 가능할까? 물론 이런 평가는 별로 없다. 하지만 필자 생각에는 가능하다. 기존 평가와 공존하기 어렵지만 어쩔 수 없다. 한편으로는 곤혹스럽다. 그러나 장점으로 볼 수도 있다. 다양한 해석, 심지어 상반된 해석의 가능한 영화. <모던 타임스>가 갖는 매력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의 힘···계급 이동이 가능하다!

이 점을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시스템에는 인류가 그 동안 갖지 못했던 엄청난 장점이 있다.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리 근간이 붕괴되지 않은 채 500년 이상 유지되고 있는 이유도 그 '강점' 때문일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강점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 인류가 갖지 못했던 강점 중의 강점이 있으니 바로 자유로운 신분 이동의 '가능성'이다.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로 규정했다. 당연히 자본주의도 그렇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지배-피지배 계급 간 충돌과 갈등이 있다는 점에서 예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는 예전 제도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지배-피지계 계급 간 이동이 그 이전 어느 시스템보다 자유롭다는 점이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지배계급이 될 수 있다. 또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이 사례는, 비록 드물고 어렵기는 해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 찾을 수 있다. 현재 부르주아 계급도 과거 언젠가는 지배받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을 수 있다. 이전의 시스템에서 피지배계급은 돈 벌 기회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돈을 많이 번 것과 신분의 변화는 별개였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다른 것이다.

이 같은 '신분 이동의 가능성'은 지배받는 계급 프롤레타리아에게 '꿈'을 준다. 나도 열심히 일하고 아껴 쓰고 투자 잘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부르주아 지배계급이 될 수 있다! 이 '열린 가능성'과 '꿈'은 프롤레타리아에게 희망과 기대, 열정과 인내를 준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가 갖는 커다란 강점일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모던 타임스>는 자본주의 예찬 영화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수 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가난한 노동자와 소녀는 그래도 꿈을 키우며 용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엔딩 시퀀스는 그 같은 메시지를 갖는 영화의 정점(頂点)을 보여준다.

'모던 타임스'의 엔딩 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쇼트 중 첫 번째 쇼트에는 ‘밝음’이 있다.
'모던 타임스'의 엔딩 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쇼트 중 첫 번째 쇼트에는 '밝음'이 있다.

새벽. 소녀는 길거리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다. 옆에는 무심한 표정으로 땀에 젖은 발을 말리는 떠돌이가 있다. 일터에서 쫓겨나고 경찰에 끌려갈 뻔하다 간신히 도망친 그들이다. 밤새 걸었던 소녀는 서러움에 눈물을 흘린다. 이 쇼트 뒤에 이런 자막이 흐른다.

"살려고 노력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죠?(What's use of trying?)"

그러자 '떠돌이'가 용기를 준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아 소녀에게 말하는 쇼트 뒤에 나오는 자막은 이렇다.

"기운을 내요. 죽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우리는 잘 할 수 있어요!(Buck up-Never say die. We'll get along!")

주먹을 불끈 쥔 '떠돌이'의 말에 죽고 싶어 하는 고아 소녀도 힘을 낸다. 둘은 손을 잡고 꿋꿋하게 카메라를 향해 걷는다. '떠돌이'가 소녀에게 웃으라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소녀도 그를 따라 웃는다. 결의에 찬 두 사람의 얼굴에 보름달 같은 함박웃음이 핀다.

'모던 타임스'의 엔딩 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쇼트 중 두 번째 쇼트에는 첫 번째 쇼트와 다르게 왠지 모를 ‘어둠’이 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은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해피 엔딩일까, 새드 엔딩일까?
'모던 타임스'의 엔딩 신을 구성하는 두 개의 쇼트 중 두 번째 쇼트에는 첫 번째 쇼트와 다르게 왠지 모를 '어둠'이 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은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해피 엔딩일까, 새드 엔딩일까?

하지만 영화는 이 쇼트로 끝나지 않는다. 채플린은 영화를 끝내기 위해 쇼트 하나를 더 쓴다. 막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걷는 쇼트다. 두 주인공의 뒷모습이 담겨 있는 이 쇼트, 애매하다. 왠지 어둡고 쓸쓸해 보인다. '새벽(Dawn)'이라는 자막이 없었다면 '석양'으로도 볼 수도 있다. '석양'은 늙음과 슬픔을 상징한다. 그러니 바로 직전 쇼트와 대비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엔딩 신에 담긴 마지막 두 쇼트에는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 앞 쇼트에는 밝음-웃음-결의-희망이 있는 반면 두 번째 쇼트에는 어둠-쓸쓸함-미결(未決)-실망이 있다. 앞서 말했듯 첫 번째 쇼트에는 '새벽'이, 두 번째 쇼트에는 '석양'이 보인다. 그리고 두 주인공들은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두 쇼트는 왜 이리 달라 보이는 걸까? 일관된 것은 음악이다. 무겁고 어둡고 슬픈 음악이 끊기지 않고 두 쇼트를 잇는다. 밝고 희망찬 내용과 상반된다. 우연일까, 잘못 접근한 것일까, 아니면 감독의 의도일까? 이 같은 대비는 이 엔딩 신에 다양하고 심지어 상반되는 해석의 가능성을 연다. 최소 다음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➀친자본주의적 해석=이들의 희망찬 모습을 보라. 이처럼 역경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만 가능하다. 자본주의는 "노력하면 가난한 자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신분상승, 계급상승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인류가 만든 유일한 체제다. 영화 전반의 기조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다 해도 이 엔딩 신에서 채플린은 영화 전반을 넘어서는 새로운 메시지를 전한다. "자본주의의 현재는 어둡지만 미래는 밝다"는 의미다.

➁반자본주의적 해석=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내 계급 상승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어쩌다 나오는 사례일 뿐이다. 채플린이 밝고 희망찬 내용인 엔딩 신의 분위기 전반을 어둡게 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밝은 마음으로 시작해도 그 끝은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전체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같은 맥락에서 마지막 엔딩 신을 봐야 한다.

➂친공산주의적 해석=어둠과 슬픔을 간직한 마지막 쇼트는 희망과 용기를 보여주려는 직전 쇼트가 거짓이고 가짜임을 제시한다. 자본주의 체제라 해도 계급ㆍ신분 상승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지배계급은 '계급 이동의 꿈'을 주며 피지배계급을 현혹할 뿐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부르주아는 노동계급의 동의를 얻으며 그들의 혁명성을 제거한다. 채플린은 <모던 타임스>의 엔딩 신에 이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혹독한 진실을 잘 감춰뒀다.

<모던 타임스>의 엔딩 신은 이처럼 모호하다. 내용은 '밝음'이지만 형식은 '어둠'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는 채플린의 유명한 두 전작(前作) <키드(1919)>와 <씨티 라이트(1931)>의 엔딩 신과 비교된다. 이 두 작품은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모던 타임스>의 모호한 엔딩과 그로 인한 다양하고 상반된 해석 가능성. 우리가 이 영화를 다시 주목하고 재해석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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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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