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실세들 국민지지와 '아부' 사이에서 고민하며 예상쪽지 써내
당시 거금인 상금 500만원은 받았지만 주변에선 '곱지 않은'시선
1971년 2월 초에 3차 계획이 확정된 것을 계기로 쓰루는 선거 지원을 위한 행보를 서둘렀다. 부산 같은 항구도시에서는 항만개발계획의 출범을 위한 관계 장관회의를 열고, 광주 같은 지방 중심도시에서는 4대강 유역 개발계획을 가지고 정부 합동회의를 여는 등 4월 대선을 앞두고 전국을 돌며 박 정권의 경제적 성과와 향후 경제 발전 홍보에 열을 올렸다.
당시 세계 경제, 특히 선진국들은 불황 속의 인플레 현상, 소위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 휘말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지지부진한 선진국과는 대조적으로 한국 경제가 비교적 물가가 안정된 가운데 역동성을 보이는 점에 착안하여, '한국 경제는 안정 속 고도성장'이라면서 '프로스터빌리티(prostability・prosperity+stability 안정 속의 번영)'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기자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선거가 임박해지면서 각 경제부처 장관들을 대동한 그의 합동 기자회견이 더 잦아졌다. '정치인 쓰루'의 행보가 너무 빈번해지면서 언론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언론은 '쓰루답지 않은 행보'에 실망을 표현하였다. 평소 그의 은근한 응원군이었던 기자들도 '쓰루 역시 결국은 박통의 명운에 목을 맨 직업관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았다.
"김 부총리가 하필이면 왜 이 시점을 택해 전례가 없을 만큼 합동 기자회견을 계속 열어야 하고 또 장래에 대한 전망과 아울러 과거에 대한 실적 등을 새삼 공표하게 된 것인지 그 동기에 대해선 석연치 않은 대목이 있다는 것이다. …… 희망적인 관측이 담뿍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는 대목마저 없지 않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면 모처럼 열린 이러한 합동 기자회견의 뜻한 바를 다시 한번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동아일보 1971년 4월 8일 자)
71년 4월 중순 7대 대통령 선거를 1주일 앞둔 어느 날 저녁. 청와대와 인접한 궁정동 안가에는 당정의 핵심 인사들이 모여 막바지 선거 전략을 짜고 있었다. 백두진 국무총리, 김학렬 부총리, 박경원 내무장관, 신직수 검찰총장 등 내각팀과 길재호 사무총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김창근 대변인으로 구성된 공화당 그룹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물론 사실상 선거 작전을 주도하던 이후락 부장, 강창성 보안차장보 등 중정 지도부의 얼굴도 보였다. 그날 회의가 대충 마무리되고 있을 때 청와대에서 김정렴 비서실장이 내려왔다. 손에는 자그마한 종이 상자가 들려있었다.
"각하께서 선거 결과를 한번 맞혀보라고 하셨어요. 신민당 김대중 후보를 몇 표 차로 누를지 말이에요. 각자 자기 이름하고 예상 표차를 적어 이 상자 안에 집어넣으세요. 각하께서 선거가 끝나면 직접 열어보시겠답니다. 1등에게는 후한 상금이 있대요."(중앙일보 1991년 8월 23일 자)
회의 참석자들은 잠시나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삼선개헌을 통한 그해 대통령 선거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표차가 많이 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표차를 적게 써낼 수는 없었다. 박통에게 국민이 보내는 지지보다 적게 예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당치 않게 많이 써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아부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정확성과 충성심 사이에서 잠시 고심한 사람들은 예상 쪽지를 상자 안에 담았다.
선거 다음 날인 28일 청와대에서는 각료, 청와대 참모, 공화당 의원 다수가 모인 가운데 '시상식'이 있었다. 개표 결과는 94만 8000표 차였다. 그것보다 적게(90만 표) 적어낸 사람은 쓰루 한 사람뿐이었다. 대부분은 200만 표 이상, 심지어 250만 표까지 적어낸 사람도 있었다. 500만 원의 거금을 움켜쥔 주인공은 쓰루였다.
그는 엄정한 상황 판단을 택했다. 그에게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는 길은 정확한 사실 전달이었다! 다른 이들은 대통령의 기분을 건드리느니 차라리 뻔한 아부를 택했다. 그들 눈에 그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