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찰 배상 규정도 있어 돈을 찍어 달러 사느라 ' 초인플레이션 ' 불만 고조돼
배상금 상환 주장한 외무장관 피살 … 기한 내 돈 못받자 佛, 루르지방 점거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연합국 측 입장은 나라마다 달랐다. 프랑스는 혹독한 징벌을 원했다. 전쟁의 최대 피해국이었던 데다가 50년 전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복수심이 컸던 탓이다. 반면 영국은 비교적 온화했다.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의 독주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은 아예 전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었다. 유럽 내 문제보다 세계평화를 우선시 했다.
--------------------------------------------------------------------------------------------------------------------
그럼에도 조약 내용은 독일에 가혹했다. 우선 적잖은 영토와 군사력을 잃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모두 뒤집어 써야 했다. 이는 곧 '배상'의 문제가 남아 있음을 뜻했다.
'배상'은 모두 '돈'에 직결돼 있었다. 도대체 얼마의 돈을 줘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조약에서 배상금 문제는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세부 사안은 추후 배상금위원회를 설립해 다루기로 했다. 고심하던 독일 총리는 사임했다. 조약에 서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체결은 후임 총리 몫이었다. 결국 조약에 서명하고 만다. "다시 전쟁을 치르겠느냐"는 연합국 측의 윽박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배상금, 독일 GNP 2.6배
결국 배상금 문제도 정해졌다. 놀라웠다. 배상 규모를 보면 안다. 자그마치 1320억 골드마르크(Goldmark). 골드마르크는 1873년부터 1914년까지 통용된 독일 제국의 통화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사라졌던 화폐다. 하지만 배상금 문제 해결 과정에서 다시 무대 위에 등장했다. 전쟁 발발과 함께 금본위제를 폐지하고 새로 만든 종이 돈 파피마르크(Papiemark)로는 배상금 문제를 얘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치가 너무 떨어졌고 등락 폭이 지나쳤던 것이다. 위원회는 골드마르크의 가치까지 정했다. 1골드마르크는 358mg의 순금과 연동된 것으로, 2790 골드마르크가 순금 1kg의 가치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 전 통용되던 골드마르크와 같은 교환비율이었다.
이 돈의 규모를 파악하려면 몇 가지 비교대상이 필요하다. 우선 이 돈을 순금으로 환산해 보자. 그럼 4만7300t이나 됐다.
당시 연간 세계 금 생산량이 500t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액수였다. 이는 또한 전쟁 전 독일 전체 재산의 절반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또한 1913년 기준으로 독일의 국민총생산(GNP)의 260%에 이르렀다.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이 프랑스에 부과했던 배상금 액수가 프랑스 GNP의 25%였다는 점을 감안해 보라. 그럼 그 규모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GNP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액수가 무려 10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또한 이 금액은 당시 달러 당 4마르크라는 환율을 적용시켰을 때 330억 달러 규모로 1921년 미국의 GNP 700억 달러의 절반에 해당된다.
지불 방식과 배상 비율도 정해졌다. 배상금 상당액은 석탄이나 철광석 등 물품 지급이 가능했다. 그러나 매년 20억 골드마르크는 현찰로 지불해야 했다.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한 명목으로 수출에 대해 관세 26%를 부과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배상 비율은 프랑스가 52%로 절반을 차지했다. 그 다음이 영국과 이탈리아로 각각 22%와 10%를 받아가기로 했다.
나머지는 벨기에와 그리스, 루마니아 등이 있었고 멀리 동방의 일본도 0.75%의 배상금을 할당받았다. 당장의 지불 일정도 잡혔다. 첫 번째 지불 만기는 그해 이었으며 갚아야 할 돈은 10억 골드 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독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도 돈도 없었다. 방법은 하나. 돈을 찍어 내는 것이었다. 그걸로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였다. 당연히 마르크화 가치는 떨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악화됐다. 독일 정부는 돈을 미친 듯이 찍어냈다. 돈 가치는 더욱 떨어졌고 돈을 찍어내 빚을 갚겠다는 전략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돈을 찍어내면 찍어낼수록 마르크화의 가치는 더욱 폭락해 더 이상 마르크화로 달러나 금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철체절명의 위기로 몰리고 있었다.
독일이 맞은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큰 문제에 봉착했다. 달러를 사 빚을 갚기 위해 찍은 마르크 화폐가 부메랑이 돼서 국내 시장을 강타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20년대 초 발생한 허이퍼인플레이션이다.
1919~21년 약 3년 동안 물가는 약 1조배 올랐다. 1923년 10월 한 달 동안에만 물가가 300배 올랐다. 뛰어난 상상력이 있어도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같은 인플레이션은 정치ㆍ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됐다. 독일 국민은 베르사유 조약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약에 도장을 찍은 정부를 가리켜 '국민의 등에 칼을 꽂은 자'라고 불렀다. 심지어 배상금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외무장관이 피살되는 일까지 생겼다. 그 틈을 극우 세력이 치고 들어왔다. 그들과 그들을 따르는 민중은 점점 더 과격해지고 더 폭력적으로 변해 갔다.
■ 배상금 상환 주장하던 외무장관 피살
사실 독일은, 육해공 모든 부문에서 전쟁을 직접 수행한 당사국이었지만, 그럼에도 직접적인 전쟁피해는 크지 않았다. 대규모 전쟁이 주로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벌어졌던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독일 경제는 전쟁이 끝날 무렵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물론 전쟁 중 인플레이션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 중 인플레이션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으며 독일도 그 이상을 넘지는 않았다. 1921년 전반기 환율은 달러 당 90마르크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교환됐다. 그러다 실질적인 부채 상환일과 액수가 정해지면서 돈을 찍어내자 사달이 났던 것이다. 1921년 중반기 들어 환율이 치솟았다. 빚을 갚아야 할 시간이 다가왔던 것이다. 그해 6월 달러는 330마르크로까지 치솟았다.
독일 정부 입장에서 보면 돈을 아무리 많이 찍어내도 소용이 없었다. 돈 가치만 떨어져 외부적으로는 외환을 살 수 없었고 내부적으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거기에 정치ㆍ사회적 혼란도 가중됐다. 당연히 협상국에 대한 빚도 제대로 갚지 못했다. 빚 갚기를 연기한 것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1922년 마침내 우려했던 문제가 터졌다. 그해 2월 독일은 프랑스에 상환해야 할 배상금 5억 골드마르크를 상환하지 못했다. 일종의 국가 디폴트 사태가 터졌던 것이다. 그러자 프랑스가 기다렸다는 듯 바로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의 주요 산업지역인 루르(Ruhr)지방을 점거하기에 이른다.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