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생명인 모델들이 피멍 들고 다리 다쳐도 "저 뛸 수 있어요" 애원
최용수 전 FC서울 감독 "프로 선수들이 구척장신보다 못하다" 쓴소리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 감동할 줄 몰랐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22일 우승팀을 가린 SBS TV의 '골 때리는 그녀들' 얘기다.
지난해 추석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내보냈다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정규 프로그램으로 탄생했다.
우연히 파일럿을 본 죄(?)로 매주 수요일 본방송을 사수하는 팬이 됐다. 여자들끼리 공을 차는 예능, 웃음이 몸에 배어있는 개그우먼들조차 웃음기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진지한 예능이라니.
이런 게 예능 프로그램일 리가 없다. 이런 게 축구 경기일 리가 없다. 그런데 왜 나는 한 차례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을까. 몰입도만 보면 월드컵 본선 한국 경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축구의 '축'자도 모르는 여자들을 모아 '웃기는' 예능 하나 만들어보자는 게 제작진의 의도였으리라. 하지만 제작진은 몰랐다. 여자들이 축구에 미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나도 몰랐다. 몸이 생명인 모델들조차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진심일 줄은. 처음에는 신기해서 보다가 점점 놀라고, 결국엔 감동 해버렸다.
도쿄 올림픽 여자배구에 버금가는 감동이었다. 김연경 선수가 외쳤던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않게. 후회하지 않게"를 이들은 매 경기, 매 순간, 누구나 외쳤다.
가수, 배우, 개그우먼, 타 종목 선수 출신, 축구선수 부인, 외국인 등 축구로 치면 오합지졸(?) 여자들이었다. 태어나서 축구공을 한 번도 차보지 않은 엄마들, 50이 넘은 아줌마들도 태반이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축구를 대하는 자세, 밥 먹을 때도 축구공을 발에서 놓지 않는 모습, 공에 얼굴을 맞아도 "괜찮아" 소리치며 뛰어가는 모습(그게 얼마나 아픈지는 맞아본 사람은 다 안다), 분명히 다리를 다쳤는데도 "저 뛸 수 있어요"라며 감독에게 애원하는 모습,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실력 등을 보며 이들에게서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발견했다.
지난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프로축구 FC서울 감독직을 내려놓은 최용수 감독.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맹활약 중이다. 최 감독은 여기서도 모델들로 구성된 '구척장신'팀 감독을 맡았다. 최 감독 역시 그냥 '예능' 하나 더 하는 걸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휘청휘청 쓰러지던 모델들이 열정과 투지로 똘똘 뭉쳐 무섭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다. 그리고 이런 쓴소리를 했다.
"프로 선수들이 구척장신보다 못하다."
그가 맡았던 FC서울은 지난해 하위권을 맴돌았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후임 감독인 박진섭 감독도 불과 9개월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서울을 연고로 호화 멤버를 갖고 있으면서도 2부리그 강등을 걱정해야 하는 팀이다.
꼴찌를 하는 팀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피와 땀과 열정과 패기로 똘똘 뭉쳐 있는데 단지 객관적인 실력이 모자라서 꼴찌를 하는 팀은 거의 없다.
최 감독의 쓴소리는 비단 FC서울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축구, 야구, 배구, 농구 등 모든 프로 선수들이 과연 '골때녀'들만큼의 열정이 있을까.
프로 선수는 팬들의 관심을 먹고 산다. 팬들은 무엇을 보고 관심을 가질까. 성적만이 다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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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6년 중앙일보 입사. 사회부-경제부 거쳐 93년 3월부터 체육부 기자 시작. 축구-야구-농구-배구 등 주요 종목 취재를 했으며 93년 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98년 프랑스 월드컵,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과 한일 월드컵,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등을 현장 취재했다. 중앙일보 체육부장 시절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으며Jtbc 초대 문화스포츠부장을 거쳐 2013년 중앙북스 상무로 퇴직했다. 현재 1인 출판사 'LiSa' 대표이며 저서로 부부에세이 '느림보 토끼와 함께 살기'와 소설 '파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