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와 언론계 반응 싸늘 … "차 몇 대 없는데 돈 들여 부자 놀러 다니는 데 쓰일 것"
정부와 현대건설 등에 건설비 산출 명령 … 기획원은 안 냈다가 부총리교체 빌미돼
쓰루가 청와대에 들어가고 4개월 뒤,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 유세 중 박 대통령이 "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대(大)국토 건설계획을 발전시켜 고속도로와 항만 건설 및 4대강 유역의 종합 개발을 추진하겠다.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강릉, 부산, 목포를 잇는 기간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세 가지 사업 모두 훗날 '부총리 쓰루'와 관련이 있게 된다. 우연의 일치는 아니다. 청와대 수석으로 있으면서 그들 국가과제가 어떻게 발상되어 씨앗이 뿌려지고, 어떻게 그 건설의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특히 박통이 그들 사업에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쓰루가 부총리 2년 차인 1970년에 완공이 되었고, 항만 건설과 4대강 유역 개발사업은 1971년, 즉 부총리 3년 차에 총선과 대선을 유리하게 이끌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그 건설계획들이 확정되거나 그 첫 삽이 떠지게 된다.
경부고속도로 공약은 기본 구상이나 비용 추산도 없이 선거용으로 내세운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언론도 경부고속도로 공약을 선거가 끝나면 도로 책상 속에 들어가고 말게 될 공약(空約)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입 다물고 있으면 고속도로가 정말로 지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경제성을 들어 반대하기 일쑤였다. 건설 재원 마련의 총책인 장기영 부총리조차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계나 언론계의 반응은 더 좋지 않았다. '차가 몇 대 되지도 않는데 엄청난 비용을 들여 고속도로를 만들어봤자, 부자들 놀러 다니는 데에나 쓰일 것이다', '빈곤한 지방에까지 과소비를 조장할 것이다'라는 얘기였다. 그들 표현을 빌리면 '돈도 없는 집구석에 누구 좋아하라고 그 돈을 들여 고속도로를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통 자신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필생의 과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기획원, 건설부, 재무부, 서울시, 육군 등에 고속도로 건설비를 개략적으로 계산해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민간기업 중에는 태국에 진출해 고속도로를 건설해본 경험이 있는 현대건설에 공사비 추정 요청을 했다. 공사비 추계는 180억 원에서 650억 원까지 고무줄이었다. 얼마나 제대로 된 고속도로를 건설할 것인지에 따라 건설비가 크게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 기획원은 아예 건설비 추계를 제출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해 10월 부총리 교체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박통만이 알고 있었다.)
박통도 건설비 추정치가 너무 엄청나게 나오자 '기존의 국도를 좀 넓히고, 구부러진 것은 좀 펴고 해서 간단하게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비용과 건설 의지 사이에서 박통이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중에 쓰루가 나섰다.
그는 스스로 고속도로에 관해 기본 지식을 넓히고 있었다. 일본에서 고속도로에 대한 전문서적을 공수해 와서 읽어본 바로는, 제대로 기능을 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면 단순히 국도를 재포장하는 정도로는 될 수가 없었다. 도로 폭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확장하고 직선 도로를 만들어 속도를 지속적으로 높일 수 있어야 하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중앙분리대를 엄격하게 설치하는 등 반드시 갖춰야 할 국제적 기준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자세히 보고서로 제출했고, 이 정보를 기초로 박 대통령은 왕초를 내보낸 다음 달인 1967년 11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지시했다. 그리고 전 부처의 예산을 일괄적으로 5%씩 줄여 그 건설 재원으로 사용하라는 지시도 같이 내렸다. 쾌도난마식의 예산 조치에 쓰루의 입김이 느껴진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430억 원의 공사비가 들어갔다. 1967년 예산의 24%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그의 열의에는 왕초의 '남의 집 불 보듯' 하는 태도에 대한 반발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1968년 2월에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418㎞는 쓰루 부총리 2년 차였던 1970년 7월 완공된다. 세계 어느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도 본 적이 없는 최단기, 최저 비용(1㎞당 1억 원)으로 일궈낸 '단군 이래의 대역사(大役事)'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