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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더 본드⑲채플린 "전선 나갈 것"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위기史(12)더 본드⑲채플린 "전선 나갈 것"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9.14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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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기피 여론에 정면 돌파 … 미국주재 영국대사관 "채플린은 기피 아니다" 면죄부
영국정부와 모종의 이면합의 설 파다 … 채플린 '리버티 본드' 채권 판매에 선봉 역할

"나는 언제라도 조국의 부름에 응할 것이며 당국에서 가장 유익하다고 여기는 군대의 어느 부서에서든 기꺼이 복무할 의향이 있다. ······ 나는 이 자리에서 징병에 응모하는 바이며 어떠한 예외나 혜택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징집된다면 나는 다른 모든 애국적인 시민들과 똑같이 전선으로 나갈 것이다."

1917년 8월 4일, 채플린은 자신의 병역과 관련해 이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국가의 부름이 있다면 입대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채플린의 '병역기피'를 의심한 영국의 언론인 알프레도 노스클리프(Alfred Northcliff)가 강력한 비난의 칼럼을 쓰고 두 달 남짓 지난 때였다. 한 해 전 노스클리프의 비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일부 언론 및 대중의 비난과 조롱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전쟁 중이었다. 병역 기피자 '딱지'는 파멸을 의미했다. 그는 성명 말미에 "워싱턴 주재 대사를 통해 영국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복무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짐을 쌀 태세였다.

■ 英, "채플린은 병역 기피 아니다."

얼마 뒤였다. 채플린의 성명에 대한 미국 주재 영국 대사관의 입장이 알려졌다. "미국에서 징병법을 발효시키라는 (영국정부로부터의) 훈령을 받지 않는 한, 그리고 그 이후에 그가 입대를 거부하지 않는 한 채플린을 병역기피자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또한 대사관측은 "현재 이곳(미국)에는 징병법이 적용되지 않고 있으며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거주해온 채플린을 병역 기피자로 볼 수 없다"고도 했다. 대사관이 그에게 완전한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가 입대하지 않아도 공을 세울 방법이 있음을 천명했다. "참호 속에 들어가는 일만큼이나 돈을 많이 벌어 전시 공채에 출자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그의 병역 관련 여론은 쉽게 잠들지 않았다. 채플린뿐 아니라 형 시드니도 나이를 속여 군대를 가지 않았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러자 채플린과 측근이 최후의 수단을 동원했다. 매니저였던 알프 리브스(Alf Reeves)가 "채플린은 1917년 6월 5일 이미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으며 그때 체중 미달로 불합격됐다"는 내용의 보도 자료를 언론에 뿌렸던 것이다. 그가 밝힌 채플린은 신장 162.5cm(5ft 4in)에, 체중 50.8kg(8st, 14LB)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는, 어린 시절 빈곤했던 탓에, 다양한 병력(病歷)도 있었다. 영양실조, 천식, 만성 신경과민 등이 잘 알려진 그의 병력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가 군대를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채플린의 전신사진. 채플린은 1917년 6월 이미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으며 신장 162.5cm에, 체중 50.8kg로 불합격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반에게 알려졌던 그의 신장(165cm) 및 체중(58.5kg)과 큰 차이를 보여 논란이 됐다.
채플린의 전신사진. 채플린은 1917년 6월 이미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받았으며 신장 162.5cm에, 체중 50.8kg로 불합격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반에게 알려졌던 그의 신장(165cm) 및 체중(58.5kg)과 큰 차이를 보여 논란이 됐다.

하지만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한 논란거리다. 우선 당시 일반에 알려져 있던 채플린의 신장과 체중은 각각 165cm(5ft 5in)와 58.5kg(129LB)이었다. 영국 징병법 기준에 따르면, 징집 대상이 된다. 하지만 보도 자료에 따르면 키는 1in, 몸무게는 무려 8kg 가까이 줄어든다. 보도 자료에 대해 의심이 생기는 것도 자연스럽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채플린은 1918년 4월 병역 문제로 또 한 차례 홍역을 치른다. 한 언론이 그가 영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얻은 뒤 미군으로 입대한다고 보도했던 것이다. 세상은 한바탕 소동이 났지만 최종적으로는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그때나 지금이나 채플린의 병역과 관련해서는 의심스러운 게 많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즉, 그는 군대를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국(母國) 영국에서도 거주국 미국에서도 군대를 가지 않았다. 수 백 만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난리통이었음에도. 양국 정부는 진짜 신체적 이유로 채플린을 전장에 보내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무엇을 택하든 확정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양국 정부와 채플린 간 모종의 타협을 '가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양국 정부는 얼마든지 그를 징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양국 정부는 그에게서 입대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봤을 것이다.

사실 채플린은 전쟁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개인주의자, 평화주의자, 그리고 반전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나 자유시장경제에도 반발했던 인물이다. 노동자에게 너무 잔인한 제도로 봤던 것이다. 그의 1936년 작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는 그의 이 같은 사상이 잘 녹아들어 있다. 게다가 그는 무정부주의자였다. 이 역시 알려진 것은 꽤 됐지만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고백한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1957년 영국 언론인 엘라 윈터(Ella Winter)와의 인터뷰에서였다. 그는 "난 무정부주의자고 정부와 규칙과 구속을 싫어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제1차 세계개전 당시 영국과 미국정부를 위해 일했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열심히. 이 대목에서 의구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개인주의자,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 세계주의자, 반시장주의자, 반자본주의자, 무정부주의자라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자본주의 발전의 극한 형태인 제국주의 전쟁의 한 축을 담담하는 이를 위해 바람잡이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언행이 다른 위선자였던 것일까? 답을 내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만큼 복잡하다. 그래도 답을 내 보도록 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영국과 미국 양국 정부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가 했던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하다. 그는 과연 어떤 일을 했던 것일까? 크게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1.재정적 기여 ··· 전시채권에 60만 달러 투자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게 재정적 기여다. 누차 얘기했지만 전쟁은 곧 돈이다. 돈이 승패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야 한다. 방법은 어떤 게 있을까? 크게 세 가지다. ➀세금을 더 걷거나 ➁다른 나라 정부나 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리거나 ➂자기나라 또는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이자를 주고 채권을 파는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 이중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세 번째다. 국민에게 채권을 팔면 돈은 돈대로 모으고 국민에게 전쟁의 당위성을 알리고 국민과 군인의 사기 또한 높일 수 있다. 그러니 큰돈을 들여 채권을 사주는 일은 '애국'이다. 정부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1917년 8월 4일 채플린이 언론에 병역 관련 성명을 발표하며 재정 측면에서의 기여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복무 의향이 있다"며 '병역 기피자'라는 항간의 비난을 일축하는 한편 "나는 미국과 영국의 전쟁 수행에 25만 달러를 투자했다"고 말해 자신이 이미 정부에 재정적으로 적잖이 기여했음을 밝혔던 것이다. 이때의 '투자'란 말은 곧 영국과 미국의 채권을 구매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가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린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두 달 전 영국의 언론인 노스클리프가 채플린을 '병역 기피자'로 몰아가며 그를 비난하는 칼럼에서 "외신에 따르면 채플린이 2만5000파운드를 투자했다고 했지만 이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썼던 것이다. 마치 거짓말이거나 헛소문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제1차 ‘리버티 본드’. 미국 재무부는 전시 채권인 리버티 본드를 총 5회 발행, 전비(戰費) 및 전후 복구비로 충당했다.
제1차 '리버티 본드'. 미국 재무부는 전시 채권인 리버티 본드를 총 5회 발행, 전비(戰費) 및 전후 복구비로 충당했다.

앞서 말했듯 전시에 정부 채권을 사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채플린의 성명에 답을 하던 미국 주재 영국 대사관 역시 이 점을 강조한다. "채플린은 참호 속에 들어가는 일만큼이나 돈을 많이 벌어 전시 공채에 출자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시공채에 대한 채플린의 투자는 그렇게 높은 점수를 받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재벌도 울고 갈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 1916년 한 해 동안 그가 벌어들인 돈은 67만 달러에 이른다. 25만 달러는 그다지 많은 돈이 아니었다. 게다가 공채 매입은 '투자'였다. 돈을 거저 주는 '기부'가 아니었다. 연간 5% 전후의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잠시 뒤 얘기하겠지만 그는 자신이 세일즈에 나섰던 리버티 본드에도 35만 달러를 투자했다고 밝혔다.

2.전시공채 세일즈 ··· '리버티 본드' 판매 선봉장

전시채권에 대한 투자는 중요하다. 하지만 채플인의 공채 투자는 정부나 언론, 대중 모두에게 성에 차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채플린이 워낙 돈을 많이 버는 거물급 영화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채권 투자로 병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면 그는 훨씬 더 많은 돈을 투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부의 기대는 훨씬 더 컸다. 이 사실은 그의 이 두 번째 기여에서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전시 공채의 직접 매입에 그치지 않고 판매책이라는 궂은 역할까지 해냈던 것이다. 이 열 두 번째 시리즈의 첫 번째 글을 보라. 이미 그곳에서 채플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상세히 썼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났으니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윌슨이 의회에 참전 요청을 한 게 1918년 4월 2일이었다. 4일 후인 4월 6일에는 의회가 참전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마침내 미국의 참전이 결정됐다. 그리고 약 2주일 반이 지난 4월 24일 의회는 전시공채 발행을 위한 긴급대출법을 통과시킨다. 이로써 태어난 게 '리버티 본드(Liberty Bond)'다. 당시 정부는 전시 자금을 250억 달러로 추산했다. 이중 1/3은 증세를 통해 2/3는 채권발행을 통해 모금할 계획이었다. 따라서 채권의 판매에 정부는 사활을 걸어야 할 판이었다. 미국정부가 전시채권을 발행한 것은 모두 5차례. 1차는 1917년 4월 24일, 2차는 10월 1일, 3차는 1918년 4월 5일, 그리고 전쟁 중 시행됐던 마지막 4차는 그해 9월 28일이다. 전후복구비 마련을 위한 제5차 리버티 본드 발행일은 1919년 4월 21일이었다.

채플린이 처음 세일즈에 나섰던 것은 1918년 4월 3차 발행 때였다. 당시 재무장관 매커두의 부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자신 소유의 첫 스튜디오가 있던 LA에서 워싱턴으로 향했던 것이 4월 1일. 훗날 초기 프랑스 아방가르드의 대표 주자였던 루이 델뤽(Louis Delluc)에게 "영화 역사상 최초의 종합예술작품"이라 평가 받았던 <개의 생애(A Dog's Life)>의 편집을, 3일 밤샘 작업 끝에 막 마무리 한 뒤였다. 자서전에서 그는,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이틀 동안 잠만 잤다"고 썼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었다. "한 번도 격식을 갖춘 글을 써 본 적도 없었고 연설을 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 도착한 그는 본격적으로 세일즈에 돌입한다. 유력 정치인이나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한 스포츠 스타처럼 퍼레이드까지 펼친 이들은 캠페인의 공식 발대식에 참석한 뒤 군중이 집결해 있던 축구장으로 행진했다. 그는 세일즈 강연을 시작한 것은 그곳부터였다. "독일군이 우리 턱밑까지 왔으니 그들을 저지해야 한다"며 "리버티 본드를 구입해 그들을 막자"고 외쳤다. 그가 엄청난 군중 앞에서 연설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Douglas Fairbanks)나 메리 픽포드(Mary Pickford) 등 평소 친분이 있던 유명 영화인들과 함께였지만 그는 몹시 긴장하고 떨리는 모습이었다. 연설 중 연단에서 떨어지는 실수까지 있었다.

두려움과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워싱턴에서의 발대식과 대중연설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는 다음 목적지인 뉴욕을 향했다. 1918년 4월 8일 정오, 드디어 그는 뉴욕의 심장부 월스트리트의 단상에 섰다. 아침부터 모여든 군중은 얼추 2만~3만을 헤아렸다. TV도 없던 시절이었다. 스크린에서나 만날 수 있는 대스타가 온다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모여든 군중 중 일부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고 심지어 가로등 위에 올라가 위태로운 모습으로 그를 보려던 사람들도 있었다. 마침내 채플린이 등장하자 군중은 열광했다. 그가 말문을 열자 군중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더 했다. 몇몇은 혼절하고 병원에 실려 가기까지 했다.

‘리버티 본드’ 제5차 세일즈 캠페인. 채플린은 3차에 이어 이번 5차 캠페인에도 적극 나서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리버티 본드' 제5차 세일즈 캠페인. 채플린은 3차에 이어 이번 5차 캠페인에도 적극 나서 대중의 환호를 받았다.

채플린도 흥분했다. 그 같은 대중의 열기를 느끼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확성기를 손에 든 채 그는 미친 듯 소리쳤다. "엉클 샘의 육군과 해군을 유지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며 "공채 이자가 얼마인지 등은 잊으라"고 했다. "바다 건너 사악한 카이저를 프랑스에서 몰아내기 위해 우리는 달러를 모아야 한다"고도 외쳤다. 군중은 중간 중간 크게 박수치고 웃으며 그에게 화답했다. 연설은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그의 공채 세일즈 활동은 계속됐다. 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켄터키, 테네시, 미시시피 등 미국 남부 전역을 누볐다. 그가 다시 자신의 스튜디오로 돌아온 것은 집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공채 외판원'으로서의 역할은 그에게 몹시 힘든 일이었다. 그는 이전까지 거대한 군중 앞에 서 본 적도, 연설한 적도 없었다. 그는 투어 전부터 커다란 불안과 공포를 느꼈다고 알려져 있다. 더욱이 그는 무정부주의에 반전주의자였다. 자기모순에 빠진 스트레스를 견디기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워싱턴에서는 무대 위에서 떨어지는 실수를 했고 3주 예정이었던 단독 투어 계획은 일정을 채우지 못하고 끝났다. 그는 당시 '탈진 상태'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공채 세일즈 활동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됐다. 1919년 4월 LA에서 열렸던 제5차 리버티 본드 판매 캠페인에서는 밴드 지휘를 맡는 등 적극적인 쇼맨십을 발휘, 이때도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그의 세일즈 캠페인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제3차 리버티 본드의 세일즈 캠페인을 회상하며 자서전에서 뿌듯한 마음에 이렇게 쓰고 있다.

"(워싱턴에서의) 리버티 본드 캠페인이 워낙 대규모였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나는 쉽게 수백만 달러 어치를 팔 수 있었다. ··· 우리 여행의 절정은 뉴욕 월스트리트에 있는 재무성 분국 앞에서 가진 마지막 캠페인이었다. 나는 메리, 더글러스와 함께 이곳에서 200만 달러 이상의 리버티 본드를 팔았다."

3.영화제작 ··· <어깨총> <더 본드> 남겨

자 이제 그가 영국과 미국 정부에 기여한 마지막 세 번째 내용을 살펴보자. 사실, 전시채권을 사거나 전시채권을 세일즈하는 것은 그의 본연의 업무가 아니었다. 그는 영화인이었다. 그가 영국과 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영화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그가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어깨총(Shoulder Arms)>과 <더 본드(The Bond)>가 그것이다. 두 영화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제작됐다. 제3차 리버티본드 판매 캠페인 투어를 다녀온 뒤였다. <어깨총>은 1918년 5월 말 촬영을 시작해 10월에 개봉했으며 <더본드>는 8월에 작업을 시작해 일주일 만에 마쳤고 9월에 개봉했다.

<어깨총>이 미국이나 영국 정부의 선전영화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는 엄숙한 전쟁 영화를 코믹하게 그리는 것에 부담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폐기할까 고민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는 개봉됐다. 그리고 반응이 좋았다. 전쟁 막바지였다. 웃으며 전쟁을 체험한다는 대중의 유쾌한 경험이 성공 요인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게다가 참혹한 현실을 웃음 속에서 찾아낸다는 것이 채플린 영화의 특성 중 하나다. 참호를 메운 물속에서 잠을 자는 장면 등에 대해서는 전장의 현실을 제대로 풍자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거기에, 비록 영화 속에서는 꿈으로 끝나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뒤뚱거리며 독일 황제 체포에 성공한다. 정부도 권력자도 좋아할만한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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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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