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장관 협의 질문엔 "장관 자리를 걸고 막을 것"
정치 자금줄이란 속사정 모르고 날뛰다 낙마 재촉
김학렬 재무장관의 말대로라면, 현금차관은 '악질 자본'이고 차관 업체는 현금차관을 들여와 '장난을 치고' 있는데, 이같이 '사회정의에 명백히 위배'되는 짓을 (왕초가 장관인) 기획원이 그동안 허용해온 셈이다.
배경 설명이 끝나자 바로 기자들로부터 "이 결정은 관계 장관과 협의한 것이냐?"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는 "현금차관은 재무부 장관의 전권 사안이다. 다른 부처와 협의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고는 "오래오래 생각해왔다. 어떤 문제보다 심각하므로 여하한 압력이 있다 하더라도 현금차관을 허용치 않겠으며 이 문제로 재무부 장관을 그만두게 될지 모르나 자리를 걸고 막겠다"면서, 비장한 어투로 "어제 집사람하고는 상의를 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조선일보 11월12일자)
현금차관 규제로 자신의 관직을 걸고 왕초와 정면 승부를 벌이려는 것이었다.
(사실 현금차관이 재무부 장관 전권 사안이라는 그의 단언은 100% 맞는 얘기는 아니었다. 엄격히 따지자면 현금차관 중 3년 이내에 원금을 상환해야 하는 '단기 차관'만 재무장관 소관이고, 장기의 현금차관은 기획원 장관의 소관이었다. 통화량에 문제가 되는 현금차관의 대부분이 단기 차관이긴 했다.)
왕초의 '차관 다다익선(多多益善)' 주장이 줄기찬 만큼 쓰루의 차관 경계론 내지 현금차관 반대론 또한 끈질겼다. 그런 정책 이견에는 그와 왕초 간의 불편한 관계가 상당 부분 작용하고 있었다. 관청과 언론사가 몰려 있던 광화문 주변에 이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론은 왕초 부총리와 쓰루 재무장관 간의 이견과 다툼을 즐기면서 둘 사이의 정책 마찰을 개인 간의 이전투구로 부추기기에 바빴다.
"김 재무와 장 기획의 정책적인 대립은 김 재무가 자기 소관인 단기 현금차관을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을 계기로 점입가경…… 김 재무 왈, 지금까지 내자용 현금차관을 허락한 것은 원칙에 어긋난 시책이라고 못을 박고 내자용 현금차관을 꾀한 자들을 무일푼으로 거부를 노리는 봉이 김선달에 비유했는데…… 장 기획은 장기 현금차관이 조건이 좋아 계속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니…… 장 기획은 경제 이론에 어긋나고 원칙에 위배되는 일을 계속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해석되어…… 앞으로 누구 이론이 옳은 것으로 판정될 것인지 궁금한 일이거니와 판정 내용에 따라 감투 자체에까지도 영향을 주게 될 것 같아 주목되는 일……."(매일경제 1966년 11월14일자)
그때까지 쓰루는 현금차관이 박 정권의 주요한 정치자금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외자 도입은 허가 절차가 밀실에서 이뤄지고, 들여오기만 하면 막대한 차익을 취할 수 있는 속성상 정치자금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자 동원용 현금차관일수록 검은 거래는 더했다.(상세 후술)
정치에 무지한 그는 그런 내밀한 속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었던 것이다. 그의 현금차관 금지 발언은, 날짜만 정해지지 않았을 뿐 자신의 퇴임을 재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