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루가 부총리고 왕초가 차관이었다면 왕초는 벌써 쫓겨 났을 것 "세평 돌아
"내가 장관이면 욱하는차관 잘랐을 것" 쓰루도 왕초의 그릇이 더 크다고 인정
추진력과 판단력 하모니 이룬 두 사람은 기획원의 전성시대 이끈 쌍두마차役
왕초는 자기와 뜻이 맞지 않으면 경제부처 장관을 자주 교체했다.
특히 부총리 재임 3년 5개월 동안 재무장관을 5명이나 바꾸었다. 그런데도 쓰루가 재무장관으로 승진되어 나갈 때까지 2년 4개월 동안 그를 차관으로 계속 데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왕초가 그릇이 커도 상당히 컸음이 분명하다.
"두 분이 갈라설 일이 몇 번 있었는데, 왕초가 포용력으로 이를 잘 넘겼다. 만일 입장이 바뀌어 쓰루가 부총리고 왕초가 차관이었다면 왕초는 벌써 쫓겨났을 것이다. 이것만 생각해봐도 왕초가 그릇이 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쓰루가 왕초 밑에서 최장수 차관을 지낼 수 있었던 데에는 주변 사람들의 충언도 한몫을 했다. 그들은 왕초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할 때는 "정통 관료 제1호를 품지 못하고 내보내면 부총리 자격이 있는 것인가"라며 왕초를 다독이고, 쓰루가 지나친 하극상을 벌일 때는 나무라듯 그를 달래곤 했다.
왕초가 '그릇이 크다'는 점은 쓰루도 인정하는 바였다. 한번은 당시 한국일보의 기획원 출입기자였던 엄일영 씨가 쓰루에게 물었다.
"만약 차관께서 장관 자리에 있다면 욕하는 차관을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그랬더니 쓰루는 '나 같으면 그런 녀석은 단칼에 잘라버리지'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그렇다면 누가 더 스케일이 큰 겁니까'라고 물으니 쓰루는 '그야 왕초지' 하고 웃어요. 그러면서도 쓰루는 토를 달더라고요. '우리는 머리와 손이 거꾸로 달려 있어. 내가 판단력이 좋으니 장관을 하고 왕초가 추진력이 좋으니 차관을 해야 하는데'라고요."
청와대 경제비서관(1967·1971년)과 8~10대 의원을 지낸 박명근 씨도 비슷한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67년 10월 부총리를 그만두면서 왕초는 박 대통령에게 인사드리고 경제수석이던 쓰루 방에 들렀어요. 왕초는 '내가 경제수석 방에 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내가 부총리로 있을 때 당신을 재무장관으로 컴백시키려고 했는데 못 해서 유감'이라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요. 왕초가 나가자 쓰루는 나한테 '내가 다른 건 다 자신 있어도 저 양반의 저런 처세술에는 못 당하겠어. 왕초는 역시 오야붕 기질이 있어'라고 하더군요."
속을 들여다보면, 왕초와 쓰루 간에 유사한 점도 많았다. 일에 대한 성과로 자신을 내보이려는, 과시욕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열정 또는 헌신에 관한 한 두 사람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정책관은 달라도 '밀어붙이기'식의 정책 추진이나 부처 장악 스타일도 비슷했다.
특별한 배경이 없다는 이유 때문인지 학연·지연 등 '관계'보다는 '능력' 위주로 인물을 판단했고,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효율을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으며, 논리와 주장보다는 사실과 현장을 중시했다는 점 등에서도 두 사람은 같았다.
기획원이라는 조직에 대한 애착 또한 비슷했다. 기획원과 그 장관은 능력에 있어서나 업무 지식에 있어서 여느 부처보다 앞서야 한다는 자부심 또한 두 사람 공히 극단적으로 강했다. 그래서 쓰루를 포함해 훗날의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들은 왕초가 남긴 ('기획원은 최고의 부처여야 한다'는) 유산 덕을 많이 보았다.
그 유산의 대부분은 '경제팀장' 부총리와 '최고 최강의 부처' 기획원의 위상을 높인 점과 관련이 있었다. 왕초가 없었다면 쓰루 부총리도 없었을 것이다.
장기영: '왕초', '개발 불도저', '외자 도입의 선봉장', '뛰면서 생각한다'
김학렬: '인간컴퓨터', '추진력 갖춘 안정론자', '경제기획 풍토의 조성자', '서기형 행정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두 사람. 그래서 갈등과 격돌도 잦았던 두 사람에 대한 세간의 평은 이처럼 다양하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경제기획원의 황금기를 구가했고, 경제기획원의 위상을 최고로 높였다는 점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