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1:35 (금)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60)바람앞의 촛불 '기획원 원장'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60)바람앞의 촛불 '기획원 원장'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1.04.27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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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거리가 있는 군사정권의 경제개발 기대 충족못하자 잦은 교체
김유택ㆍ 유창순 원장 잇단 단명…기획원 차관 올라 재원마련에 부심
부흥부가 아닌 부처 출신 첫 기획원 차관에 오르자 '부흥부 파벌' 와해
경제정책 전환 기대했던 미국과 대화채널 재개 되자 협상채널 전면에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5·16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의 행정 체제는 좀처럼 정착되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기대와 민간 장관의 행정 수행 능력 간의 괴리 때문에 기획원 원장이 서너 달 만에 교체되는 일이 잦았다.

원장의 불안한 입지는 기획원 안에서 쓰루의 역할을 더 강하게 또 더 넓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쓰루는 스스로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라며 늘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대한 자신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1962년 후반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정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 작업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1차 계획과는 처음부터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 그는 그 계획을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큰소리만 땅땅 친, 허황한 계획'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수립된 계획이어서 그가 나서서 개선할 틈 자체가 없었다. 실제로 1차 계획 수정 작업은 본안의 큰 틀은 그대로 두고 성장, 투자, 수출 등 주요 목표를 하향 조정하는 수준에 그쳤다. (연평균 성장률 목표는 7.1%에서 5%로, 총투자율은 22.6%에서 17%로 낮추었다.)

유창순 원장(사진)은 1963년 경제기획원 원장자리에 올랐으나 두 달만에 교체됐다. 사진은 1982년 학군단(R.O.T.C.) 임관식에 참석한 유창순 당시 국무총리. 사진=국가기록원.
유창순 원장(사진)은 1963년 경제기획원 원장자리에 올랐으나 두 달만에 교체됐다. 사진은 1982년 학군단(R.O.T.C.) 임관식에 참석한 유창순 당시 국무총리. 사진=국가기록원.

이래저래 그에게 급선무는 경제개발계획 수정이 아니었다. 그에게 발등의 불은 국내외 재원 조달, 특히 무역 적자를 메우기 위한 외자 확보였다. 개발에 소요되는 자원은 날로 늘어나고 원조 등 외자는 줄어드는 가운데, 경제는 위기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김유택 기획원 장관은 본인이 USOM 처장과 합의하여 폐지한 한미 간 정책 협의 채널을 복원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한국의 정책 변화를 기대하고 있던 미국 당국은 김 원장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963년 2월, 쓰루에게 늘 기댈 언덕이었던 김 원장이 또다시 물러났다. 그리고 유창순 원장이 들어왔으나, 두 달 뒤 기획원은 원영석 씨를 새 원장으로 맞아들였다. 경제 상황처럼 기획원 원장의 명운도 바람 앞의 촛불이었던 거다.

원 원장은 취임 두 달 뒤 6월 28일, 쓰루를 부원장(차관)으로 임명했다. 부흥부가 아닌 부처 출신이 기획원 차관이 된 첫 케이스였다. 그날은 (부흥부, 재무부, 내무부 등) 출신 부처별로 형성되어 있던 기획원 내 파벌이 와해되고, 특히 부흥부 출신 관료들이 고난을 겪게 되는 첫날이었다. 다음 달 원 원장이 미국 원조 당국에 '간청'한 결과, 양국 간 정책 협의 채널이 7월 18일 ECC(Economic Cooperation Committee·한미경제협력위원회)라는 새 간판을 달고 재가동되었다.

7월 30일 기획원에서 ECC 첫 회의가 열렸다. 한국 측에서는 기획원 원장과 부원장 그리고 재무, 상공, 농림 장관이, 미국 측에서는 USOM 처장과 기획국장, 투자재정국장 등이 참석했다. 그 후 경제기획원과 USOM 간의 모든 '고위 정책 협의'에서 '고위'는 쓰루를 의미했다. 그가 차관이 되었을 즈음에는 그의 개인적 정책 소통 상대가 USOM 처장급으로 올라가 있었다. USOM 처장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정책, 특히 미국 원조 및 차관의 '종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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