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경제를 모토로 삼는 미국의 정책 노선과 어긋나 … 갈수록 미국의 무상원조 줄어
美 눈 밖에 나면서 韓美 정책협의도 중단…미국 원조 당국과 투명하고 솔직한 대화로 돌파
총체적 부족 상황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은 전형적인 땜질 처방이었다.
5개년 계획의 성장률과 투자율을 낮추어 정부 부문의 외자 소요(국제수지 적자 요인)를 줄이고, 극히 필수적인 상품(원자재 등) 외에는 수입 규제를 엄격히 하여 외자 소요를 줄이려고 했다.
물가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통제를 동원했다. '5·15선(線)'이라고 하여 쌀, 보리쌀, 연탄, 무연탄, 비료 등 물가 상승을 주도하는 주요 품목에 대해 1961년 5월 16일 이후의 가격 상승은 인정해주지 않았다. 부원장보(차관보) 시절부터 물가대책위원장으로 가격 동결 등 물가통제를 지휘하였던 쓰루는 부원장(차관)이 되어서도 물가대책위원장으로서 종합 물가대책을 수립, 공표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격 통제와 더불어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자주 동원되는 수단은 매점매석 일제단속, 가격 과다 인상 업자에 대한 중과세 등이었다. 당시의 행정 능력(인원과 체제)으로는 가격 통제 후 과다 인상에 대한 일벌백계 방식의 벌칙 부과가 유일한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획원이나 농림부 관료들은 다 알고 있듯이, 물자 부족으로 야기된 물가 상승이 정부의 억제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물가 통제를 동원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물자 부족과 인플레 기대심리가 심각했던 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한 자리로 안정되었던 물가상승률은 1963년, 1964년 두 해 연속 20%를 넘어 30%에 육박했다. '5·15선'을 기준으로 하는 가격 통제는 63년 1월엔 21개 품목으로 늘어나 64년까지 계속되었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가격 통제였지만, 그것 또한 한미 협력관계를 흔들어놓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었다. 미국이 보기에는, 한국 군사정권이 경제개발계획을 명분으로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벗어나려 하더니, 이제는 가격 통제로 드러내놓고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모토로 삼는 미국의 정책 노선과 근본적으로 어긋나는 일들이 미국 원조 제1의 수혜국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미국의 무상원조 삭감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50년대 한미는 미국 원조를 중심으로 환율, 물가, 재정 및 통화 등 다양한 경제정책 현안을 협의하는 CEB(Combined Economic Board·한미합동경제위원회)라는 긴밀한 채널을 가지고 있었다. CEB를 통한 정책 협의는 원조를 해주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정책 조언이었지만, 원조를 받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내정간섭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군사정권 지원에 대한 미국의 부정적 인식과 미국 정부와의 협력관계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한국의 부정적 인식은 결국 '협의 이혼'으로 귀결되었다. 1961년 7월 22일 경제기획원 원장이 된 김유택 씨가 불과 보름 뒤(8월 8일) 모이어(Moyer) 유솜(USOM·미국대외원조기관) 처장과 CEB를 통한 정책 협의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 후, 한국 경제정책에 왈가왈부할 수 없게 된 미국은 원조의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의 의례적인 협의 접촉에만 응했다.
송요찬 내각수반 겸 경제기획원 원장이 물러난 자리에 1962년 7월 9일 기획원 원장으로 컴백한 김유택 씨는 그날부로 쓰루를 기획 담당부원장보(차관보)로 복귀시키고, 다시 2주 후 운영 담당 부원장보(차관보)로 전보 발령 냈다. 내자(예산)와 외자(원조 등)를 양손에 쥐고 있는 막강한 직책이었다.
명실공히 나라 안에서든 나라 밖에서든 경제개발을 위한 재원 확보가 그의 최대 소임이 된 것이다. 자연히, 미국 원조 당국과 협의를 하는 것이 그의 주요 임무가 되었다. 그는 미국처럼 상거래나 정책 결정 과정이 투명한 사회일수록 개인적인 유대관계가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가 주목한 것은 미국인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소가 솔직한 소통을 통한 신뢰 구축이라는 점이었다. '솔직'은 그의 제2의 이름(second name)이었다!
쓰루가 상대하는 USOM 등 미국 관료들에게 그는 새로운 한인류(韓人流)였다. 그들이 그동안 접해온 한국인들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정이 바뀌면 언제 말을 뒤집을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쓰루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유머가 가득 차고, 숨김이 없으며, 한번 정한 것에 두말하지 않는 그를 믿고 좋아했다. 그가 한번 입으로 뱉은 말은 보증수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