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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1) '바람과 라이온'④ 美'중앙銀 78년 공백'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1) '바람과 라이온'④ 美'중앙銀 78년 공백'
  • 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1.01.14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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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1914년 '중앙은행'실종 … 남북 갈등과 잇단 철도회사 파산, 공황 등 겹쳐 경제 혼란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 위기 부추겨 부 축적 후 금융 장악위해 '연준설립' 주도 음모론 눈길

특정 개념의 가장 간략한 정의를 알아보려면 국어사전을 참고하는 게 좋다. '중앙은행'의 개념도 마찬가지. 네이버 국어사전의 정의를 보자.

'한 나라의 금융과 통화 정책의 주체가 되는 은행. 은행권을 발행하고 국고의 출납을 다루며 금융 정책을 시행한다.'

광의(廣義)이기는 해도 정확하다. ①은행권 발행 ②국고의 출납 ③금융정책의 시행 등을 맡은 한 나라의 금융ㆍ통화 정책의 주체라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역사는 앞선 글에서 얘기했던 내용 그대로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은행'이라는 것이 생긴 이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많은 이들이 이 '중앙은행'과 관련된 아이디어들을 쏟아냈다. 그러다 1668년 세계 첫 중앙은행으로 평가되는 스웨덴의 릭스방크(Riksbank)가 출현했고 1694년에는 현대적 의미에서의 중앙은행 형태를 갖춘 잉글랜드은행이 탄생했다. 이로써 중앙은행은 무려 350년 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는 중앙은행 없는 나라경제는 상상하기 어렵다.

지난 번 글에서 썼듯 미국의 중앙은행 역사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1791년 설립된 첫 번째 중앙은행이 20년 뒤인 1811년 문을 닫았고 5년 뒤인 1816년 다시 설립된 두 번째 중앙은행 역시 20년 뒤인 1836년 폐쇄됐다. 그리고 세 번째 중앙은행인 지금의 연방준비제도(FRS, Federal Reserve System)가 출범한 게 1914년이다. 두 번째와 무려 78년이라는 긴 공백이 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이 긴 시간 동안 왜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으며 그 동안 미국경제는 어떻게 운영됐나, 그리고 왜 20세기 들어 새롭게 중앙은행 설립이 추진됐는가. 이번 글은 주로 이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 78년 동안 중앙은행 없이 견딘 미국, 이유는?

19세기와 20세를 나눠 간단히 얘기해 보자. 일단 19세 사정이다.

①1836년 두 번째 중앙은행의 폐쇄는 앞선 글에서 말했듯 두 번째 중앙은행의 통화량ㆍ대출 축소, 그리고 그에 따른 경기위축 및 그에 대한 반발 때문이다.

미국의 두 번째 중앙은행이 폐쇄된 뒤 남북전쟁 등 극도의 내분으로 세 번째 중앙은행에 대한 논의는 뒤로 뒤로 미뤄졌다.
미국의 두 번째 중앙은행이 폐쇄된 뒤 남북전쟁 등 극도의 내분으로 세 번째 중앙은행에 대한 논의는 뒤로 미뤄졌다.

②이 같은 경제정책에 따른 피해는 주로 농업지역에 집중됐다는 사실도 앞글에서 밝혔다. 이는 곧 농업지역과 공업지역 간 갈등, 연방주의와 반(反)연방주의 간 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갈등은 결국 남북갈등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내전으로까지 비화된다.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진 것이다.

③1865년 전쟁은 끝났지만 실질적인 남북통일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링컨 대통령 암살에서도 알 수 있듯 정치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전쟁과 노예해방으로 경제가 붕괴된 남부 주(州)들은 패전 뒤에도 여전히 연방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남부의 여러 주들은 남북전쟁이 종결 후 10년 가까이 지난 1877년에야 비로소 연방 정부에 복귀했다.

④전후 미국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1860년 영국과 프랑스 간 통상조약(영불통상조약) 체결로 관세장벽이 사라지는 등 갑작스러운 자유무역 분위기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통화체계에도 급속한 변동이 생겼다. 당시 세계 주요 나라들이 채택한 금은(金銀) '복본위제'가 급속도로 금본위 단일 체제로 옮겨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⑤특히 금본위제로의 복귀에 따른 금융시장 위기가 중요하다. 1873년 2월 은화를 폐화(廢貨)시키는 주화법이 통과되자 급격한 금리인상과 물가하락으로 시장이 큰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해 9월 두 번째 대륙횡단 철도에 막대한 투자를 계획했던 제이쿡사(Jay Cooke & Company)가 파산하자 관련 금융 및 보험회사가 연쇄 파산했고, 급기야 증권거래소가 폐쇄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시작된 불황은 무려 20여 년을 끌며 미국은 물론 세계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줬다. 남아도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새로운 시장과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니 이때의 불황은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게 한 주범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⑥1873년의 경제위기 이후 20년 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던 미국경제는 1893년 다시 한 번 고꾸라진다. 위기의 계기는 20년 전과 비슷했다. 그해 2월 필라델피아 철도 회사의 파산으로 미국 내 자본이 빠져나가면서 금융시장이 붕괴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몇몇 은행과 주식거래소의 폐쇄로까지 이어지자 위기 극복에 한계를 느낀 정부는 결국 J. P. 모건(Morgan)과 로스차일드(Rothschild) 등 민간은행으로부터 6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차입해야 했다.

이로써 1836년 두 번째 중앙은행 폐쇄 뒤 무려 80년 가까이 미국이 중앙은행 없이 간 것도 이해가 된다. 한 마디로 세 번째 중앙은행 설립을 진지하게 재검토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북 간 갈등, 그에 따른 전쟁, 그리고 전후의 정치ㆍ경제적 혼란이 미국을 짓눌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20세기 들어 바뀌기 시작한다. 특히 중요한 것이 1907년 발생된 또 한 번의 경제위기였다. 세 번째 중앙은행인 연준의 설립 배경이 되는 1907년의 위기, 그리고 그에 따른 연준의 설립은 다음처럼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①1873년 시작된 기나 긴 불황은 1893년 또 한 번의 위기와 함께 종결됐다. 이후 미국경제는 비상(飛上)을 시작한다. 1890년대 중반 이후 약 10년 동안 미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7%를 넘어섰다.

②그러나 1906년 미국경제는 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해 4월 진도 7.9의 엄청난 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덮쳤던 것이다. 지진은 가스관을 파괴해 대규모 화재를 일으켰고 여기에 송수관까지 파괴되면서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추산 피해액은 무려 3억5000만~5억 달러. 이는 그해 미국 국민총생산의 1.2~1.7%에 해당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미국은 20세기 첫 경제위기를 맞는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미국은 20세기 첫 경제위기를 맞는다.

③주식시장도 휘청거렸다. 며칠 사이 시가총액이 12.5%나 떨어졌다. 철도와 보험사 주가는 더 크게 영향을 받아 철도의 경우는 15% 내외, 보험사는 15~30%까지 폭락했다. 특히 보험사가 문제였다. 화재와 인명피해 등으로 보상 금액이 추정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④위태로웠던 주식시장은 1907년 3월 붕괴 조짐까지 보였다. 며칠 사이 주가는 9.8%나 하락했고 특히 해운, 광산, 철강, 철도 등은 낙폭이 커서 13~17%에 달했다.

⑤본격적인 위기는 9월에 시작됐다. 여름 내내 변동성 장세에 시달리던 증시는 9월 스탠더드 오일이 독점 금지법 위반으로 2900만 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자 순식간에 폭락했다. 주가는 9월 한 달 동안 24.4%가 폭락했다. 10월 들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신탁회사 니커보커 트러스트(Knickerbocker Trust)가 파산할 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자 현금을 찾기 위한 뱅크 런이 줄을 이었고 전국 주요 도시의 증시는 폐장하거나 폐장 위기까지 몰렸다.

⑥중앙은행 없는 정부로서는 이 같은 위기에 특별히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또 한 번, 마치 1893년 위기 때처럼, 민간의 큰 손 J. P. 모건이 나서야 했다. 1907년 10월 24일 랜섬 토마스 뉴욕증권거래소 사장은 모건을 찾아가 2500만 달러의 긴급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이를 얻지 못하면 상장 기업 50개가 도산할 테고 증권시장 조기 폐장도 불가피하다고 얘기였다. 이에 모건은 즉석에서 2500만 달러의 긴급자금을 제공했다.

⑦하지만 이 돈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 만에 돈은 다시 바닥을 드러냈고 이미 8개의 은행과 투신사가 도산하고 말았다. 모건은 다시 한 번 2500만 달러를 들여 이 회사를 살려내며 미국증시와 미국경제를 위기에서 구원해 냈다.

1907년의 금융위기는 미국경제를 초토화시킬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당연히 그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했다. 1908년 5월 의회는 1907년의 위기의 원인과 재발방지를 위해 '국가통화위원회(National Monetary Commission)'을 설립하고 위원장으로 넬슨 올드리치(Nelson Aldrich) 상원의원을 임명했다.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이후 유럽을 방문해 은행 시스템을 연구하고 앞글에서 말한 대로 금융전문가를 이끌고 1910년 11월 제킬 아일랜드를 방문, 연준 관련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13년 연방준비제도법 통과에 이어 1914년 마침내 연방준비제도가 정식 출범하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미국경제사학계 또는 미국금융사학회에서 제시하는 정론이다. 핵심은 이렇다. 즉, ①미국의 중앙은행 설립의 배경에는 연방주의자와 반(反)연방주의자들의 갈등이 있었고 ②누가 정치적으로 우세한가, 또 경제위기 후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얼마나 느꼈는가에 따라 설립되고 폐기됐다. ③이 같은 상황은 남북전쟁이 끝난 뒤에도 상당 기간 유지됐다. ④결국 1907년 경제위기 뒤 다시 한 번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 및 정치권, 그리고 재계의 요청에 따라 재추진됐고 이것이 1914년 연준의 출범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 연준 배후는 로스차일드?

그러나 역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학계의 지배적인 해석이 있는가 하면 소수의 다양한 견해도 있다. 게다가 '학계의 지배적인 견해'라 해서 무조건 따르는 것이 능사인 것도 아니다.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에 대한 해석도 그렇다. 앞서 말한 '지배적인 해석'이 다가 아니다. 이와 관련, 특히 '음모론(陰謀論)'으로 일컬어지는 세계 소수 금융엘리트들의 세계지배에 대한 해석이 눈길을 끈다. 미국 중앙은행과 관련된 음모론은 꽤나 강력하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와 조지 피바디, 그리고 J. S. 모건  이들 3인과 그들의 후손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18세기 이후 국제 금융계를 쥐락펴락하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사진)와 조지 피바디, 그리고 J. S. 모건 이들 3인과 그들의 후손은 도움을 주고받으며 18세기 이후 국제 금융계를 쥐락펴락하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음모론'이란, 사전적으로는,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배후에 거대한 권력이나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다고 여기며 유포되는 소문'이다. 결국 우리가 쓰는 '음모론'의 뜻에는 이미 '소문'이라는 개념이 내포돼 있다. 따라서 점잖은 학계에서는 연구 대상이 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소문'이 때로 '진실'로 밝혀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특히 연준을 비롯한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를 단순히 '음모론'으로 취급하기에는 의심스러운 측면이 없지 않다.

조지 피바디.
조지 피바디.

연준과 관련된 음모론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자. 1991년 미국 국회도서관 직원이었던 유스터스 멀린스(Eustace Mullins)의 『누가 99%를 터는가』(천지인, 2012), 2009년 국제경제 전문가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윌리엄 엥달(William Engdahl)의 『화폐의 신』(길, 2015), 그리고 금융전문가로 2007년 발간 후 중국 대륙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쑹훙빙(宋鴻兵)의 『화폐전쟁』(랜덤하우스, 2008) 등이 될 것이다. 특히 멀린스의 책은 연준 관련 음모론의 교범으로 활용됨으로써 이후 음모론의 근간을 이룬다.

이들의 주장은 그럴 듯하다. 근거로 제시한 1차 사료도 믿을 만한 게 꽤 있다. 그렇다면 '단순한 소문'으로 정리되는 '음모론'의 범주를 넘어설 수도 있다. 즉,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가설 수준으로 다뤄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 '가설'은 '소수 금융엘리트의 금융시장 지배 가설'로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줄여 '금융엘리트 지배가설'로 불러 보자. 그럼 이 음모론 또는 가설은 다음처럼 정리될 것 같다.

J.S.모건.
J.S.모건.

①영국 중심의 유럽 금융엘리트들은 잉글랜드은행에 대한 지배권 확보로 돈벌이는 물론 영국의 경제와 정치력까지 장악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잉글랜드은행 모델'을 미국으로까지 확장하기 바랐다.

②19세기를 전후해 잉글랜드은행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금융권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후 이들은 은밀하게 신흥 금융엘리트들을 지원ㆍ결탁하며 세계금융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 됐다. J. P. 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원하고 결탁한 신흥 금융엘리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③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의 1차 및 2차 중앙은행 설립을 주도했으며 그들의 계획에 따라 미국에는 두 차례 잉글랜드은행을 벤치마킹한 중앙은행이 설립됐다.

④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한 국제 금융 세력은 목적 달성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을 낳는 전쟁과 경제공황을 활용한다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과 공황은 실제로 그들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줬다. 1812년 영미전쟁이나 1873년, 1893년, 1907년 공황이 대표적이다.

⑤미국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한 국제금융 세력의 경제권 장악음모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양심 있는 정치인들이 이들에 반발했고 그로 인해 1차 및 2차 중앙은행의 영구적 지배는 실패하고 만다.

⑥그러나 그들의 야욕은 집요했고 결국 1907년 공황을 일으킨 뒤 마침내 세 번째 중앙은행인 연준을 설립하고 장악한다. 연준은 100년 이상을 장수(長壽), 현재에 이른다.

이처럼 미국의 중앙은행의 역사와 관련된 음모론 또는 '금융엘리트 지배 가설'의 핵심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다. 로스차일드가는 잘 알려진 대로 18세기 후반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가 일으킨 가문이다. 그는 다섯 아들을 모두 기업인이나 금융인으로 키워 세계 역사 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대한 부(富)를 일궜다. "그들이 축적한 부의 규모는 추정조차 할 수 없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럼에도 그 부의 축적 과정이나 지배구조 등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온갖 음모론의 온상이 됐다. 돈을 벌기 위해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해 경제위기나 경제공황을 일으키고 심지어 주요 전쟁 배후에는 이들의 돈벌이 목적까지 있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세계를 파탄으로 몰고 가려는 '사탄의 세력'이라는 얘기도 있다. 2020년 초 터진 코로나도 세계경제에 거품을 일으키고 이를 꺼뜨리며 새로운 자산을 축적하기 위해 이들이 일으켰다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지나친 '음모론'까지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중앙은행 설립과 관련된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야기는 진짜 '음모론'에 가까운 것일까? 아니면 필자가 '금융엘리트 지배가설'로 표현했듯 하나의 역사적 관점으로 볼 수 있는 것일까? 이를 알아보려면 무엇보다 먼저 로스차일드 가문의 부의 축적 과정 및 이 가문과 J. P. 모건(Morgan)과의 관계, 그리고 이 둘의 연결점이 됐던 조지 피바디(George peabod)와의 관계를, 조금은 상세히, 알아야 할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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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대기자
이재광 이코노텔링대기자

이재광 이코노텔링대기자❙한양대 미래인재교육원 겸임교수❙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 『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 『식민과 제국의 길』, 『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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