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피제(相避制)로 특별 연고지엔 가지 못하고 동거 가족수도 제한 '생이별'
변학도의 주색잡기를 『한국의 모든 지식』이란 책선 '단신부임' 부작용 추론
한국사를 교과서 중심으로 아는 데 그친 경우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왕이 정치 등 국정 전반을 제 마음대로 하고 지방의 수령들 또한 "네 죄를 알렷다!"하는 식의 우격다짐으로 공무를 전횡하였으리라 여기는 것이 그중 하나다.
이건 천만의 말씀이다. 왕의 권한행사는 신하들에 의해 자주 제동이 걸려, 조선의 역사를 왕권과 신권의 대결 중심으로 살피는 견해도 있을 정도다.
임금마저 그랬으니 지방의 수령들이야 그 권한에 제약이 많았음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조선의 '헌법' 또는 '행정 기본법'이라 할 『경국대전』이나 『속대전』의 편린을 엿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어쩌면 이리 꼼꼼하고 합리적인 제도를 마련해 놓았는지 놀랄 정도다.
흔히 사또로 알려진 현감, 현령 등 지방 수령의 임기는 약 900일, 햇수로 3년에 가까웠다. 한데 한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 자리는 우리가 생각하듯 그리 화려한 자리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수령의 휴가는 아주 엄격해서 연세가 많은 부모가 아니라면 3년에 한 번으로 제한되었고 성묘조차 5년에 한 번밖에 허용되지 않았단다. 세종 때 확립된 상피제(相避制)에 따르자면 특별한 연고지에는 배치 받을 수 없었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였으니 몇 차례 지방관을 전전할 경우에는 외려 가족 간 '생이별' 같지 않았을까. 이런 걱정이 단순한 기우가 아닌 것이 다산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에 『속대전』을 인용한 대목을 보면 여실히 확인된다.
"수령 가운데 가족을 지나치게 많이 데리고 간 자와, 관비를 몰래 간통한 자는 모두 적발해서 파면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니 원칙대로 라면 가족도 마음대로 대동할 수 없었겠다. 다산은 '지나치게 많이'의 기준도 제안하는데 이것이 꽤 상세하다. "부모와 처 외에는 아들 1명만 허용하되, 미혼 자녀들은 모두 허용하고, 사내종 1명과 계집종 2명 외에는 데리고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지방관이 현지 부임할 때 온 가족을 데리고 가 횡포를 부리거나 부패의 빌미가 되는 것을 막자는 뜻이지 싶다. 이런 내용은 한국사 잡학사전이라 할 만한 『한국의 모든 지식』(김흥식 지음, 서해문집)에 소개되어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저자는 《춘향전》에서 이몽룡 부친의 후임인 남원부사 변학도는 부임하는 날 기생 점고에 나서는 걸로 나오는데, 이는 그가 홀로 부임하였기 때문이라 해석한다. 변학도가 아무리 색을 밝히더라도 가족과 함께 내려갔다면 어찌 첫 날부터 그리 했겠느냐는 합리적 추론에서다.
그토록 완성도 높은 제도가 있었지만 조선시대 내내 탐관오리가 그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제도의 완성도보다 운용의 묘가 중요한 것이 어디 어제 오늘 일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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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2010년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로 정년퇴직한 후 북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엔 고려대학교 언론학부 초빙교수로 강단에 선 이후 2014년까지 7년 간 숙명여자대학교 미디어학부 겸임교수로 미디어 글쓰기를 강의했다. 네이버, 프레시안, 국민은행 인문학사이트, 아시아경제신문, 중앙일보 온라인판 등에 서평, 칼럼을 연재했다. '맛있는 책 읽기' '취재수첩보다 생생한 신문기사 쓰기' '1면으로 보는 근현대사:1884~1945'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