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기회가 있다고 여겨 당시 경남공립중 교단에 서
귀국한 쓰루가 1945년 11월에 얻은 첫 직장은 경상남도 도청이었다. 담당 업무는 회계과 금전 출납이었는데, 반년도 되지 않아 사표를 냈다.
아무런 도전도 기회도 없는 그곳은 적성에 맞지 않았다. 1946년 3월에 갈아탄 일자리가 경남공립중학교(5년제. 1951년 학제 개편으로 경남중·고교로 분리됐다)의 영어 선생 자리였다. 학교 선생으로 가면 공부할 기회가 있다고 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영어는 일제 교육의 것이다 보니 this는 '지스'로, that은 '자토'로 발음하는 식이었다.
해방이 되었다 하더라도 선생이 되려면 일본 학제 아래 사범대학교를 나와야 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교사난 속에 일본 주오대학교 졸업장은 그에게 명문 중학교 선생 자리를 마련해주기에 충분했다. 당시 좁은 부산 바닥에서는 누가 일본에서 대학 교육을 받았는지 서로 다 알고 있었다.
경남중학교에 근무하는 몇 해 동안 그는 대학을 나온 어느 '인텔리' 여성과 교제를 했다 한다. 어릴 적 고성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성인으로서의 그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부모는 집도 절도 없는 그와의 교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별 후 그 여성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고성 유수의 병원집 아들이자 전도유망한 의사인 청년과 결혼했다고 한다.
이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쓰루가 중매로 소개받은 여성이 훗날 그의 부인이 된 김옥남이다. 쓰루는 '고성 출신의 두뇌가 명석하고 일본 주오대학교 법대를 졸업한 경남중학교 영어 선생(당시 선생은 대단히 존경받는 직업이었다.)으로, 촉망받는 청년'이라고 소개되었을 것이다.
김옥남은 '일본 오사카의 조선인 부잣집 맏딸인데, 해방으로 고등학교까지만 다녔지만 어쨌든 대단한 집안의 딸'이라고 소개되었을 것이다. 쓰루는 본인 중심으로, 김옥남은 집안 중심으로 소개되었을 것이다.둘이 만나기 시작하여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당시 젊은 남녀가 어두운 극장에 같이 간다는 것은 장래를 약속한 단계로 나아가는 첫걸음으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불가피한 사정으로 김옥남이 약속시간에 10분 정도 늦었다. 중매가 아닌 교제, 즉 '현대식 연애 교제'의 경우에는 여자가 30분 정도 늦게 나가는 게 관행처럼 되어 있던 때였다. 여자가 약속시간 전에 만날 장소에 나타나면 '남자에 푹 빠진' 여자 취급을 받았다. 그 기준으로 보면, 그녀는 꽤 일찍 나간 셈이다.
그러나 그 10분은 그의 화를 머리끝까지 치밀게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헐레벌떡 영화관에 도착한 그녀에게 그는 미리 사둔 영화표를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난 영화 볼 생각 없소. 보고 싶으면 당신이나 보시오" 하고 휭하니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뭐라고 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속절없이 당하고 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