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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가 100년전에 꿈 꾼 ‘ 신도시 프로젝트’
안창호가 100년전에 꿈 꾼 ‘ 신도시 프로젝트’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9.03.16 22: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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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길림과 평양에 ‘이상촌’(理想村·Ideal village) 건설추진… LG하우시스, 임시정부 청사 등 독립운동가 기념관 개·보수 지원 활동
… 지난 3월10일 안창호 선생 서거 81주년 추모행사서 거봉그룹 백용기 회장 등에 감사패 수여
민족의 선각자인 안창호 선생이 임시정부 수립에 힘을 쓰는 시절. 그는 3곳으로 나뉘어진 임시정부 주체세력을  합치기위해 힘썼고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출범시켰다. 사진 아래 왼쪽에서 두번째가 안창호 선생. 그 왼쪽이 신익희 전 국회의장이다.
민족의 선각자인 안창호 선생이 임시정부 수립에 힘쓰던 시절. 그는 3곳으로 나뉘어진 임시정부 주체세력을 합치기위해 힘썼고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출범시켰다. 사진 아래 왼쪽에서 두번째가 안창호 선생. 그 왼쪽이 신익희 전 국회의장이다.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민족의 선각자인 안창호선생 (1878~1938)은 100년 전 동포들이 살 국내외 ‘신도시’를 꿈꿨다. 이름하여 이상촌(理想村·Ideal village건설이다. 독립운동의 기지를 확보하고 흩어져 사는 한인 동포들이 서로 협동해 더불어 사는 자력갱생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지역공동체를 통해 한민족의 응집력을 높이려는 포석이다.

요즘 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안창호 선생은 ‘국채 첫 공공택지 개발자’가 아니었을까.

이상촌 건설의 첫 프로젝트는 ‘봉밀산 개척사업’이다.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 지대인 중국 길림성 밀산부 내의 봉밀산 지역에 1911년 토지를 사들여 등기를 마쳤다. 이곳에 150여호, 100호, 50호 이렇게 3곳의 한인부락의 터를 닦았다. 1926년의 일이다.

국내에서도 지역공동체 건설에 나섰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에 따라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전감옥으로 압송된 그는 3년간 복역하고 출옥한 직후인 1935년부터 송태산장의 ‘공공택지 개발’에 나섰다.

연세대 초석을 놓은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안창호 선생.(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연세대 초석을 놓은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안창호 선생.(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송태는 평양에서 13km 정도 떨어진 강서군 대보면에 위치해 있었다. 이 곳에 농촌근대화의 핵심 인재를 양성할 직업학교를 짓고 그 주변에 이상촌을 만들려고 했다. 이같은 두 차례의 이상촌 건설 계획은 그러나 자금부족, 안창호 선생의 재구금(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등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1938년 안창호 선생이 별세하면서 이상촌 건설은 안타깝게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안창호 선생의 ‘신도시건설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됐지만 독립과 민족자존의 길을 모색한 그의 담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럼 안창호 선생이 이상촌 건설의 아이디어를 왜 냈을까.

아마도 그의 재미 유학시절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의 처참한 삶을 지켜보면서 국내외 거주 한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이를 통해 나라의 독립 기반을 다지려 했던 의도로 보인다.

그의 도미 유학은 연세대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 언더우드가 다리를 놓았다. 언더우드는 “유학을 가려면 결혼을 하고 가라”고 조언했고 안창호 선생은 1902년 연세세브란스 병원의 뿌리인 제중원에서 부인 이혜련 여사와 혼례를 치렀다.

미국교육의 시스템과 정치구조를 공부하던 안창호 선생은 동포들의 고통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 차별과 무시를 당하며 나라 잃은 슬픔까지도 견디고 있었던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미주에 살던 한인 동포들은 대부분 농장이나 세탁소 등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었고 안창호 선생은 학업을 중단하고 한인들과 함께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오렌지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같이 일했다.

안창호선생은 재외 한인들이자력갱생을 도왔다. 그래서 미국에서 본 선진 주거생활을 지켜보고 중국 길림과 평양에 '이상촌'이라는 신도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협동해 조국의 독립기반을 다지려고 했다.그러면서 한인들의 근로의욕을 부추기며
안창호선생은 재외 한인들의 자력갱생을 도왔다. 그래서 미국에서 본 선진 주거생활을 지켜보고 중국 길림과 평양에 '이상촌'이라는 신도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협동해 조국의 독립기반을 다지려고 했다.그러면서 한인들의 근로의욕을 부추기며 "일을 잘해야 농장의 매출도 늘고 그래야 한인이 인정받는다"며 미국 유학중에 미국인 소유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과 함께 오렌지를 따는 일을 했다.(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
지난 10일 서울 강남 도산 안창호기념관에서 열린 서거 81주년 추모식 장면(이코노텔링 김승희 기자)
지난 10일 서울 강남 도산 안창호기념관에서 열린 서거 81주년 추모식 장면(이코노텔링 김승희 기자)

당시 한인들은 일이 서툴렀다. 미국 농장주들이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안창호 선생은 한인 근로자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꾸기위해 노력했다.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 우리가 정성스럽게 오렌지를 따면 한국인에 대한 미국인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또 농장의 매출이 높아지면 우리의 소득도 향상되어 독립운동을 도울 수 있다”며 한인들의 근로의욕을 부추겼다.

실제로 이들 미주 노동자들이 한푼 두푼 모아 거둔 2만5천달러는 1919년 상하이 임시청사 마련의 초석이 됐다. 그 돈으로 프랑스 조계지역에 임정 건물을 마련했다. 그는 임시정부의 밑돌을 놓았지만 희생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지금의 차관급인 내무총장을 맡아 안살림을 챙기는 데 주력했다. 그의 노력으로 3곳에 흩어져 있던 임시정부를 1919년 9월에 ‘통합 임시정부’로 합쳐졌다.

임시정부의 운영을 놓고 정파간 분란이 일어나자 안창호는 임정을 떠났다. 이후 ‘국내외의 이상촌’건설에 매진하는 한편 미국,캐나다,미국,중국,러시아,독일,영국,필리핀,호주 등 10개국을 차례로 순방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밝히고 현지 한인의 단결과 한인 정체성 유지에 온 힘을 기울였다.

안창호 선생은 “조선은 공리공론의 역사다. 저만 옳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배척하는 악습이 있다.그로 인해 당쟁과 사화가 끊이질 않았다”며 민족의 대동단결과 통합을 호소했다.

한편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의 가사를 작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흥사단 애국가작사 규명위원회 오동춘 위원장은 “ 1907년 평양에서 ‘애국찬미가’와 ‘애국가’<사진>를 작사해 스코틀렌드의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안창호 선샐은 애국가를 작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가 쓴 원고(사진)을 보면 지금의 애국가 가사와 같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거기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을 붙여 공식행사때마다 애국가를 제창했다고 한다.
안창호 선생은 애국가를 작사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가 쓴 원고(사진)을 보면 지금의 애국가 가사와 같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거기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의 곡을 붙여 공식행사때마다 애국가를 제창했다고 한다.(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Syne·그리운 옛날) 곡을 붙여 붙렀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작사 미상으로 남아있는 것은 우리 국민의 수치”라고 말했다.  이 노래는 안창호선생의 주도로 임시정부의 공식행사 때마다 제창됐다고 그는 덧붙였다.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는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내 안창호기념관에서 ‘안창호선생 서거 81주기’행사를 가졌다. 이날 김재실 도산기념사업회 회장을 비롯해 박유진 광복회 회장, 정순균 강남구청장, 정창영 전 연세대 총장이 참석해 추모사를 하며 고인의 뜻을 기렸다. 거봉그룹 백용기 회장 등이 도산 안창호선생 기념사업회의 감사패를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4월의 독립운동가’로 안창호 선생을 선정해 이달 말 발표할 예정이다.

또 LG하우시스는 도산 안창호기념관을 비롯해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서재필기념관,윤봉길의사기념관 등의 개·보수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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