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무부처의 정책발표도 기획원 앞장 … 경제 지휘권 도전 땐 누구라도 가차 없이 응징
쓰루는 부총리로서의 권위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대통령이 성에 차지 않으면 부총리를 갈아치울 수는 있어도, 그가 경제팀장인 부총리로 있는 한 여타 장관이 그에게 대드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팀원인 다른 경제부처 장관으로부터 존경받기를 포기한 사람 같았다. 팀장으로서 자기가 통솔하는 대로 팀원들이 신속 정확하게 따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그는 업무 지식이나 수행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고, 자기가 담당하고 있는 정책이나 예산 결정권 등에 대한 영향력 발휘에 거침이 없었다. 그 자부심과 영향력 행사는 예산국장-기획원 차관-재무부 장관-경제수석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점차 강해져온 것이었다. 경제수석 때 이미 부총리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부총리가 되어서는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가 관장하는 업무에 관해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쓰루는 정일권, 백두진, 김종필 등 세 명의 총리를 '모셨다'. (백두진 총리 때를 제외하고는) 총리는 비(非)경제 분야, 부총리는 경제 분야로 양자간의 업무 분담이 명확했다. 총리와 부총리가 경제정책에 관해 이견을 가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설익은 민간 주도 경제론을 폈던 백 총리는 단명했다.
그는 특히 부총리 직책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고 나서는 정치적 포석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력 정치인들의 민원 중 대세에 지장이 없는 것은 깨끗이 들어주고, 대통령 측근이나 언론기관도 각별히 배려를 했다. 그러나 부총리 권위에 대한 도전은 가차 없이 응징했다. "같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도 부총리 지휘권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 봐주지만 맞서려고 하면 끝까지 갚았다."(책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그는 '뒤끝이 작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타 부처 장관을 휘어잡는 방편으로, 마치 그들이 기획원 직원이나 되는 듯 장관들의 업무 파악 여부를 체크하곤 했다. 가령 농림부 장관이 말을 안 들으면 "어제 비가 왔는데 올해 전체 강우량이 얼마냐?"고 묻는다. 즉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기라도 하면 "그런 것도 모르면서 무슨 장관을 한다고 그러느냐?"고 망신을 주는 식이었다.
"장 부총리 시절에 이미 정부가 추진하는 주요 업무가 대부분 기획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그 관성이 남아 있던 터에, (쓰루가 부총리가 된 후) 산업과 건설, 농업은 물론 긴축 기조를 위해 금융, 통화정책까지 기획원이 고삐를 쥐고 간섭하기 시작하자 다른 부처들은 바지저고리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예산 편성권을 쥐고 전 부처를 장악하는 무소불위의 '슈퍼 기획원 시대'의 도래였다."(책 '육성으로 듣는 경제기적')
그의 성격상 서둘러 정책 효과를 내려는 의욕이 앞서는 경우도 잦았다. 그럴 경우 주무 부처의 이해나 합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호관계가 순탄할 수 없었다. 그의 독불장군 스타일로 인한 경제팀 내부의 삐걱거림은 고스란히 언론에 전해졌다.
"최근 농림행정에 관한 주요 정책 결정이 주무 부처가 아닌 경제기획원에서 자주 발표되고 있어 농림부 실무진들을 당황케 하고 있는데. 지난번 쌀 배급제에 관한 폭탄적인 양정(糧政) 전환이 기획원에서 발표된 데 이어 30일에는 또다시 김학렬 기획원 장관이 하곡 수맷값 25% 인상을 공식 기자회견에서 누설, 20% 인상 계획안의 국무회의 통과를 쫓던 농림부의 취재진을 긴장시키기까지. …… 취재진이 주무 부처인 농림부에 몰려 질문 공세를 폈으나 차관을 비롯한 주무 국장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안색을 바꾸면서 뒤늦게 확인 전화를 걸어보는 실정.…… 농림부 장관의 체면이 어찌 될지." (매일경제 1971년 7월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