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서 외환수급 계획과 경상수지 목표 수치 어긋난 자료 보고 쓰루의 불호령 떨어져
외국 대표 "단기부채 어떻게 갚을 건가"에 " 서울서 내가 돈 떼먹은 적 있나 물어 봐라"
외자도입과 정치자금 연계고리 끊으려 심의위 구성하자 집권 세력서 '反쓰루' 역풍도
성장속도 예상보다 빨리 진행돼 '미국의 무상원조' 계획보다 2년 앞 당겨 1970년 졸업
1970년 4월 말에는 제네바에서 IECOK(대한경제협력기구) 4차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해의 주 관심사는 과연 한국이 외채를 갚을 능력이 있느냐였다.
IECOK 회의가 열리기 전날이었다. 쓰루는 제네바 호텔 방에서 간부들과 다음 날 회의 자료를 점검하고 있었다. 서울을 출발하기 전에 실무자들이 회의에 회의를 거듭해 마련한 자료였다. 그런데 한국 경제가 역동적으로 성장해 외채 상환에 문제가 없다는 설명 자료로 준비한 경상수지 전망 수치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외환 수급계획과 국제수지(BOP)가 각각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경상수지는 상품(교역) 수지와 서비스 교역 수지의 합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쓰루가 새파랗게 질린 담당 관료들을 일으켜 세워놓고 소리쳤다. "느그들, 지금 당장 레만호에 가! 그리고 거기서 뛰어내려, 이 ○○들아! 레만호에 빠져 죽었다면, 느그들 집안에서는 자랑일 거다."
눈썹을 휘날리며 각자 방으로 달려간 그들은 새벽잠에 빠져 있는 서울의 실무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을 확인하는 등 난리를 피운 끝에, 다음 날 한국 정부가 IECOK 회의에 내놓을 '하나의 경상수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레만호에 한국 관료의 머리 두 개가 둥둥 떴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쓰루가 만들어낸 시체 일화의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었다.
그는 그해 IECOK 회의를 외채 위기론을 불식하고 3차 계획에 대한 IECOK 참가국의 협력 약속을 거머쥐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회의 벽두에 "1969년으로 2차 계획의 최종 목표가 대부분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분위기를 띄웠다. 그런 다음 "단기 상업차관 도입은 계속 억제", "사기업의 내자 조달용 현금차관 도입은 불허",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로부터 유리한 조건의 차관 도입에 노력", "차관 원리금 부담률을 외환 총수입의 15% 이후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을 것" 등을 힘주어 설명해나갔다.
그의 열정적인 설명이 먹혀들어 간다고 여겨질 즈음인데, 어느 회원국 대표가 발언 기회를 청하더니 그를 향해 "단기 부채를 어떻게 갚을 계획이냐"고 물었다. 쓰루가 바로 마이크를 잡더니 한다는 소리가 "Gentlemen, my name is Kim, Hak Yul(여러분, 제 이름이 김학렬입니다)"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의 자기소개에 좌중은 어리둥절했다. 이어 그가 "여러분, 모두 서울에 한번 와서 물어보십시오. 이 김학렬이가 돈을 떼어먹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말이오"라고 덧붙이자, "와" 하고 폭소가 터져 나왔다.
1970년 IECOK 회의는 대성공이었다. 종합제철소 건설에 대한 지원을 딱 잘라 거절한 (박충훈 부총리가 참석했던) 1969년 회의와는 딴판이었다. 한국 경제에 대한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한 새로운 최고 정책 담당자 쓰루에 대한 그들의 신뢰는 한껏 올라갔다.
1970년 5월 26일 9시 30분 경제기획원 3층 회의실. 미국의 무상원조가 그 25년사에 종결을 고하고 있었다. 수많은 카메라맨들의 플래시 속에서 쓰루와 하워드 휴스턴 USAID 처장(겸 주한 미국대사관 경제 담당 참사관)이 무상 '지원원조(SA·Support Assistance)'의 마지막 협정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쓰루는 사무관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해 부총리가 될 때까지 줄곧 대외원조 의존이 어떻게 경제정책의 예속으로 이어지는지를 그 현장에서 지켜봤었다. 그에게 무상원조 졸업은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부터 1970년까지 미국은 한국에 대해 19억 달러에 달하는 무상 SA(개발차관, 식량 등까지 포함하면 총 41억 달러의 유무상원조)를 제공해오고 있었다. 원래 미국의 무상원조는 1972년에 가서야 종료하는 것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경제성장과 발전이 빨리 진행되어 예고했던 것보다 2년이나 빨리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대 후반에 50%에도 이르지 못하던 한국 정부의 재정 자립도는 1961년 60.8%에서 1969년 93%까지 높아졌고, 1970년에는 94%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즈음 해서 쓰루가 기획원 순시에 나섰다가 어느 사무관에게 "미국 원조 끝난 것 알고 있나?" 하고 물었다. 사무관이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럼 대응책은?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되나?" 하고 속사포같이 물었다. "그건 부총리님 하시기에 달렸습니다"라는 사무관의 재치 있는 대답에 그는 웃으며 순시를 끝냈다.
1970년 8월 12일, 쓰루는 "경제기획원 안에 투자심의회를 설치하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외자 도입 심의위원회에 회부하기 전에 기획원의 투자심의회에서 심사를 거치라는 것이었다. 외자 업체의 부실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심사 기준은 외자 도입의 적격성, 시장성, 규모의 타당성, 수익성, 재무상의 건전성, 산업 연관 효과 등 온통 경제성이었다. 정경유착 등 비경제적 이유로 음성적으로 들여오던 외자의 도입은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기획원 관할 아래 외자에 대한 투자심사제를 실시하기로 한 것은 집권 세력 내부의 정치역학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그전에도 청와대 안에 외자 도입 심의위원회가 있긴 했다. 그러나 그 허가 여부는 '외자 도입 4인방'(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여당 공화당 재경위원장, 그리고 부총리) 간의 합의에 의해 결정되었다. 말이 '4자 간 합의'이지, 사실상 '4자 간 나눠 먹기' 식이었다.
절차가 불투명하다 보니, 4인 중 어느 누가 뒤를 밀거나 애지중지하는 사업에 관해서는 서로 터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자 도입이 정치자금의 중요한 소스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4명이 각자의 몫을 챙기려는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배달 사고 등 정치자금과 관련한 비리 여부를 떠나, 기획원 안에 신설된 외자 도입 투자심사제로 인해 외자 도입 허가 절차가 투명해지고 사업의 경제성 여부가 핵심적 결정 기준이 되면서, 부총리 외의 '외자 도입 3인방'이 외자 도입 허가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게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외자 도입 3인방'의 입장에서는 투자심사제를 쓰루가 외자 도입에 관한 허가권을 독식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발상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외자 도입 절차의 투명성은 집권 세력 안에 반(反)쓰루 분위기를 조장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