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0:50 (토)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5) '성장과 안정' 두 과녁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15) '성장과 안정' 두 과녁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econopal@hotmail.com
  • 승인 2020.06.16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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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성장 불붙자 물가 안정론 대두… 포철ㆍ고속도 등 국책 사업외엔 부처와 '예산 긴축'전쟁
문공부서 북한 핑계대며 예산 읍소하자, 쓰루 "우리나라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 생각은 없소"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김학렬 부총리의 22년 관료 생활의 여정은 오로지 '5천년 가난'에 경제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정이었다. 평소 김 부총리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기록 하기를 꺼려한 까닭에 그의 육필 자료는 거의 없다. 칠순이 된 그의 장남 김정수 경제 대기자는 지난 수년간 그의 발자취를 더듬고 국가기록원 등 정부 자료집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보관중인 사진 등을 뒤져 그의 일대기를 정리했다.

 부총리로 금의환향한 김학렬은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을 ‘성장-안정-균형’의 조화를 주축으로 하는 기조로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성장과 일자리, 그리고 포항제철소 등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국가과제는 ‘빠르게’, 물가 상승, 무역 적자, 인구 증가, 외채 등 고도성장의 폐해는 ‘낮게’, 그리고 농-공 간, 지방-도시 간 발전 수준은 ‘고르게’ 하려고 애썼다. 그 모든 시도와 성과는 ‘부국의 파트너’ 박통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덕분에 기획원은 왕초 시대에 이어 ‘제2의 전성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1969년은 60년대 중반부터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성장세가 말 그대로 ‘불붙은 해’였다. 그해의 성장률은 무려 15.9%였다. 그해 인플레를 12.4%로 잡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물가와의 전면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물가를 잡는다며 해방 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경제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이제 겨우 지펴진 한국 경제 활력의 불씨를 꺼뜨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총체적인 안정화를 가로막는 또 다른 요인은 대형 국가사업들이었다. 아무리 물가 안정이 중요해도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사업을 늦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400억 원, 포항제철소 건설에는 1200억 원 넘게 소요되었다. 각각 1969년 한 해 정부예산(3300억 원)의 8분의 1과 3분의 1을 차지하는데, 두 국책사업을 합하면 한 해 예산의 절반이 투입되어야 했던 것이다.

쓰루는 예산국에 경부고속도로에 관해서는 “예산(기획원 소관)이나 자금(재무부 소관) 배정 등 필요한 조치를 당일로 처리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그래서 건설 관계자가 예산 배정을 받으러 기획원 예산국에 오는 날이면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예산국 담당자가 건설 관계자를 옆에 앉혀놓고 예산 배정서를 작성해 바로 국장의 결재를 받아주면, 건설 관계자는 배정서를 들고 바로 (같은 건물에 있는) 재무부로 가서 자금 배정을 받곤 했다.

1968년 2월에 착공된 고속도로는 건설 전반기에는 (쓰루 경제수석의 성에 차지 않게) ‘신중한’ 진척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69년 6월 쓰루가 부총리가 되자 눈에 띄게 속도가 붙게 되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천안까지 74㎞를 건설하는 데에 27개월(한 달 평균 2.8㎞ 건설)이 걸리던 것이, 쓰루가 부총리로 들어선 후 천안에서 대전까지 67㎞는 불과 3개월(한 달 평균 22.3㎞)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1969년 15.9% 고속 성장하자  물가가 걱정됐다. 물가안정을 위한 쓰루의 긴축 대상에는 예외가 없었다. 그의 긴축의지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신장율을 대폭 낮게 잡은 예산편성에서부터였다. 긴축에 의한 비명은 전부처, 전 민간부문으로 퍼져갔다. 사진은 1969년 7월 30일 예산긴축을 통해 안정성장을 기하겠다는 정부 의지를 전하는 중앙일보 2면 기사. 낮춰잡은 성장률이 11%라는 기사제목이 지금의 눈에는 인쇄가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1969년 15.9% 고속 성장하자 물가가 걱정됐다. 물가안정을 위한 쓰루의 긴축 대상에는 예외가 없었다. 그의 긴축의지를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은 신장율을 대폭 낮게 잡은 예산편성에서부터였다. 긴축에 의한 비명은 전부처, 전 민간부문으로 퍼져갔다. 사진은 1969년 7월 30일 예산긴축을 통해 안정성장을 기하겠다는 정부 의지를 전하는 중앙일보 2면 기사. 낮춰잡은 성장률이 11%라는 기사제목이 지금의 눈에는 인쇄가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당시 경제팀은 성장엔진은 꺼뜨리지 않으면서 물가 안정을 기하는 한편, 대형 국가과제는 밀고 나가야 하는 지난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쓰루는 나라 살림 전체로는 성장의 큰 틀을 건드리지 않는 가운데, 경제 발전을 상징하는 주요 국가사업에 예산을 집중 투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거기서 발생하는 예산의 커다란 빈틈은 정부 민간 구분 없는 총체적인 긴축으로 메워갔다.

초유의 긴축의 첫 희생물은 핵심 국가과제 이외의 일반 정부활동이었다. 긴축을 위해 모든 부처와의 전면전에 나서기 전, 쓰루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부터 챙겼다. 즉, 대통령으로부터 자신의 긴축 기조에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이다. 거기에 박통으로부터 “임자 말이야. 국방부, 문교부 같은 부처 예산 좀 잘 살펴봐”라는 추가 특명까지 받아 챙겼다.

박통의 지지를 등에 업었으니 그는 긴축의 칼을 휘두르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그 대상에는 예외가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재정의 성역으로 그 권위와 자유를 만끽해오던 국방부와 문교부는 갑작스러운 예산 긴축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견디다 못한 ‘정치의 달인’ 민관식 문교부 장관과 쿠데타 세력의 일원인 정래혁 국방부 장관 등 쟁쟁한 거물들조차 새파랗게 젊은 부총리를 찾아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쓰루가 부총리로서 처음으로 예산을 편성한 것은 1969년 여름이었다. 그와 예산팀은 국방부로 가서 장관, 차관, 주요 군 수뇌와 당국자를 모아놓고 예산 브리핑을 받았다. 국방예산을 어디에, 왜 써야 하는지를 국방부가 예산 당국에 브리핑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국방부가 처음 당해보는 모멸이었다.

국방부는 그해부터 예산 편성을 위해 기획원의 ‘기술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획원에서 국방부로 예산실 사람을 파견해 국방예산 편성을 도와주는 관행이 생겨나서, 나중에는 아예 기획원 담당자를 (국방예산을 담당하는) 기획 관리 차관보로 보내기도 했다. 1급(차관보) 자리 하나를 기획원에 양보하는 대신 예산을 로비할 필요가 없어진 국방부는 그런 인적 교류를 은근히 즐겼다.(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농림부 등도 기획원과 유사한 인적 교류 관계를 맺기도 했다.)

기획원은 기획원대로 국방부라는 예산의 성역을 직접 손을 볼 수 있어서 재정 관리에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국방부 예산까지 기획원이 관리한다’는데 여타 부처가 예산 문제를 가지고 기획원과 맞선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든 일이 되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케이스였던 거다.

쓰루는 ‘예산청문회’를 즐겨 활용했다. 예산청문회는 각 부처의 장관이 부총리를 상대로 부처가 애지중지하는 사업의 예산 배경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이것만은 예산을 자르지 말고 살려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하는 것인데, 예산청문회는 왕초 때 생긴 장치였다. 그러다가 박충훈 부총리 때 쓰이지 않다가 쓰루가 부활시켜 왕초보다 더 잘(?) 활용했다.

그는 집무실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녹실(Green Room)이라고 부르는 작은 방과 집무실 다른 쪽과 연결된 회의실 두 곳에서 동시에 예산청문회를 벌였다. 각 방의 장관들에게 배정된 시간은 10분이었다. 그는 10분마다 두 방을 오가며 장관들의 예산 읍소나 소원 수리를 받았다.

군소리나 장광설을 극력 혐오하는 성급한 그에게 딱 맞는 세팅이었다. 웬만한 것은 국·과장에게 맡기곤 하던 각 부처 장관들에게는 좋게 기억될 수 없는 경험이었다. 행여나 평소에 장관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몸에 밴 사람에게는 전신에 진땀 나는 일이었다.

어느 날 문화공보부 장관이 자기네 예산이 너무 박하다며 북한이 얼마나 많은 돈을 문화선전에 쓰는지 늘어놓았다. 그러자 쓰루는 “나는 우리나라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 생각은 없소”라며 장관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벽시계를 척 보더니 “앞으로 2분” 하고 소리쳤다. 당황한 장관이 버벅거리느라 2분을 다 써버리자마자, 쓰루는 바로 일어나 옆 청문회 방으로 휭하니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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