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철건설 의지에 탄복해 日관료는 요정 연회자리서 '제철소 등불 보인다' 축시
1970년 4월 영일만 모래벌판서 감격의 착공식…공사 늦어지면 부처에 불호령
1969년 9월 17일 일본에서 제철조사단이 내한했다. 그 단장인 아카사와 국장이 서울에 오면서‘긴쓰루(金鶴)’란 일본 정종을 선물했다. 포철 건설에 대한 쓰루의 헌신과 열의에 탄복한 그가 일본 전국을 뒤져 구해 온 술이었다. 기획원 관료들은 “이젠 됐다”고 쾌재를 불렀다.
쓰루와 포철 TF팀은 아카사와 조사단이 머무는 동안 그들을 극진히 ‘모셨다’. 그는 아카사와 국장에게 직접 설명하는 것을 자청했고, 저녁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명색이 부총리인데 너무 자세를 낮추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그는 태연하게 ‘격식이나 폼이 밥 먹여주냐’며 일만 성사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조사단 임무를 끝낸 아카사와 국장이 귀국하기 전날, 청운각(당시 3대 요정 중의 하나)에서 조사단의 노고에 감사하는 소연회가 벌어졌다. ‘일본 차관 협력의 3인방’, 즉 한국의 쓰루, 일본의 아카사와 국장, 그리고 양국 간에 다리 이상의 역할을 한 가네야마 주한 일본대사가 참석했다.
거기에 동석한 일본 관료(스스로를 ‘말석에 앉은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가 양국 간 차관 협력 합의의 취흥으로 시 한 수를 지어 올렸다.
<綜合製鐵 祝い唄> 종합제철 축시
赤い沢から 金山 越えて 빨간 못(아카사와)으로부터 금산(가네야마)을 넘어
‘金鶴製鐵’のオハラハア ‘금학(긴쓰루)제철’의 灯が見える 등불이 보인다
아카사와, 가네야마 등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한일 간 협력 주역의 이름을 활용해 종합제철의 출범을 축하하면서, 그 제철소 이름을 긴쓰루라고 명명한 게 눈에 띈다.
“내년 4월 착공이 확정된 연산 103만 톤 규모의 포항종합제철은 두 가지 약칭을 갖게 될 것 같다. 미국 사람들을 비롯한 구미계 인사들은 포항제철회사의 영어 약자를 따서 ‘포스코(POSCO)’라고 부르는 데 반해 일본 사람들은 ‘긴쓰루’(金鶴의 일본어 발음)제철소라고 부르고 있어 이채. 일본 사람들의 이와 같은 약칭은 두말할 것 없이 김학렬(金鶴烈) 경제기획원 장관의 이름자에서 딴 것인데, 이것은 지난번 한일각료회담 이후 줄곧 계속된 종합제철에 대한 김 장관의 극성스러운 열성에서 연유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중평.”
그날부터 약 한 달간의 집중적인 작업 끝에 기획원 TF팀은 1970년 1월에 제정된 철강공업육성법을 공포할 수 있었다. 법의 명칭은 철강공업이라고 되어 있었지만, 오직 포항제철을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었다.
1970년 4월 1일 황량한 영일만의 모래벌판에서 포항종합제철 착공식이 열렸다. ‘포항제철 3걸’ 박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 박태준 사장이 나란히 서서 종합제철 기공식 버튼을 눌렀다. (포철 건설과 관련한 박태준 사장의 역할은 그의 회고록을 참조할 것을 권한다.)
그 후 1주일이 멀다 하고 쓰루 특유의 몰아치기가 발휘되었다. 포항제철 실무 책임자를 직접 불러 진척 상황에 관해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행여나 부처의 비협조나 행정 규제 때문에 SOC(사회간접자본)나 공장 건설이 지체되는 일이 벌어지면 “협조가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며 어느 부처든지 즉시 전화를 걸어 “각하의 관심 프로젝트인데 왜 빨리 안 하느냐”며 호통을 쳤다. 즉각 해결해놓지 않고는 참지 못했다.
그는 ‘가능한 한 짧은 기간 안에 경쟁력 있고 수익성 높은 종합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에 예산을 거머쥔 부총리로서의 모든 권한을 동원했다.
우선, 건설과 초기 경영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점을 감안해 (12년간 법인세 전액 면제 등) 조세 감면, 원료 및 기자재 구입 지원, 수도·전기 등 공공요금 파격 할인, 연구개발 등 소요경비 보조 같은 온갖 비용 절감 조치를 취했다. 포철 건설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에는 더 파격적인지원을 제공했다. 아무것도 없이 모래만 있는 바닷가에 한국인이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장을 짓는 데 필요한 항만과 물류, 공업용수, 전기, 통신, 도로와 철도, 하수도 시설 등 모든 사회간접자본을 정부예산으로 마련했다. 그러다 보니 예산에 상상할 수 없는 압박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예산국 관료들이 “정말 죽을 맛”이라고 할 정도로 예산을 포철 건설에 쏟아부었다. 그것으로 모자라 ‘철강공업육성자금’을 조성하여 장기 저리로 재정 투융자를 해주고, 모든 국내 은행을 동원해 출자토록 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중화학공업화에 폭넓게 동원되었던 국민투자기금의 전신이었던 셈이다.
포철 제1기 건설비는 1200억 원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3배나 되는 내외자가 투입되었다. 덕분에 수십 년 동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종합제철소 건설사업은 일사천리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연산 103만 톤의 고로(高爐) 1기는 1973년 7월에 입화식(고로에 첫 불을 댕기는 식)이 치러졌다. 3년 3개월이라는 전례 없는 단기간에, 첨단의 기술로 최고 효율을 자랑하는 명품 종합제철소가 건설되었다. 이렇게 산업화 시대의 3대 신화 중 하나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