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별명 무색할 정도로 유머스러운데다 공직의 바른 소신 어필
속 깊은 마음까지 털어놓고 '기삿거리'흘려 경제정책의 여론도 가늠
쓰루는 언론에 관한 한 다른 장관보다 유리한 입지에서 부총리에 취임하였다. 당시는 언론사 기자들이 다분히 지사적(志士的)일 때였다.
정부에든 기업에든 매사에 공분(公憤) 수준으로 비판적이어야 언론인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기껏 오래간만에 긍정적으로 쓰는 기사도 그 끄트머리에 ‘물음표’ 멘트를 붙이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에 관한 기사는 그런 식으로 구태의연하지 않았다. 그가 구태의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론은 당시 기준으로도 과도하게 튀는 그의 언행을 늘 좋게 보도했다.
매사에 비판적인 언론이 그를 곱게 (요새 젊은이들 표현으로, ‘귀엽게’) 본 것에는, 명쾌한 성격, ‘면도날 차관’이라는 별명을 무색게 하는 유머 감각, 국회나 특히 왕초와의 관계에서 보인 공직자로서의 소신 등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아니면, ‘꼰대스러운’ 기존의 관료 체제 또는 상하로 움직이는 사회 체제에 대한 그의 해학으로부터 기자들이 대리 만족이랄까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는 차관 때부터 익살과 기행으로 많은 기삿거리를 제공해왔다. 기자들은 밥 사고 술 사며 자기네한테 잘해주는 취재 대상보다 자기네를 거칠게 대하더라도 기삿거리를 자주 제공해주는 취재원을 더 좋아한다!
45년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당시의 기획원 출입기자들은 애정을 가지고 ‘그때의 기획원과 쓰루’를 회고하면서, “아까운 사람이 너무 젊은 나이에 갔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일찍 돌아간 때문이라 해도, 기자들의 이런 긍정적 평가가 이토록 오래가는 것은 드문 예이리라.
2년 9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기획원에는 그가 차관일 때 출입하던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차관 때의 출입기자 중에는 본사에 돌아가 경제부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계익, 최우석, 김진현, 엄일영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기자 사회에서 내로라하는, 나름대로 언론계에서 일가를 이룬 중견 이상의 기자들이었다. 그런 위치의 기자나 언론계 중진이 그에 대해 비교적 좋은 인상을 가진 상태에서 기획원에 ‘금의환향’했다는 것은 그의 전형적인 관운이었다.
자신이 부총리가 되면서, 그토록 싫어하던 부총리 왕초로부터 한 가지 배워보려고 의식적으로 애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대(對)언론 관계였다. 바쁜 중에도 기자실에 자주 들러 가급적 기자들과 허심탄회한 시간을 가지려고 했고, 사적인 교분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진 기자에겐 속 깊은 이야기도 털어놓곤 했다. “내가 말이야, 재무장관에서 떨어져 경부선 야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 칼을 갈았지. 이번에 장난친 놈들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러나 이젠 다 용서하기로 했어. 이만하면 이 김학렬이도 대인(大人)이지. 허허허”자신이 이전과는 달라졌다는 이야기이자 대화 상대와 더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는 현안에 대해서 복안을 툭 털어놓으면서 기자들의 반응도 청취하고, 또한 정책에 대한 그들의 이해와 공감을 높이려고 애썼다. 박통 밑에서 2년 반 동안 경제수석으로 지내면서 국민의 지지를 얻지 않으면 나라 정책을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언론을 통해서만 국민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자주 보고 익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언론관계를 중시한 데에는 왕초를 지켜보며 또 청와대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도 정치를 할 필요가 있다’는 자각도 작용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