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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만든사람들⑲번스타인㊤그의 구세주 '피아노'
뉴욕을 만든사람들⑲번스타인㊤그의 구세주 '피아노'
  • 곽용석 이코노텔링 기자
  • felix3329@naver.com
  • 승인 2019.10.07 12: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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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손가락질 받고 천식을 앓는 등 병약했지만 음악으로 극복
' 피아노 선율 '에 빠져 대학졸업 후 부모 반대 뿌리치고 음악원에서 지휘자 수업
뉴욕 필하모니 지휘자, 급병으로 공연 못하게되자 '代打'로 나가 청중 사로 잡아

미국이 낳고 기른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 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뉴욕필하모니 지휘봉을 잡았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지휘자이기에 미국인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줬다. 독일인 카랴안에 대항할만한 스타여서 그의 탄생에 미국인들은 더욱 환호했다.

그의 조국은 미국이지만 그의 뿌리는 우크라이나다. 1908년 그의 부친, 사무엘 번스타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를 떠난다. 신천지 미국에서 제2인생을 꿈꿨다. 당시 경제난을 겪던 유럽 국가들의 어려운 사람들은 미국행을 갈망했다.

번스타인은 미국인으로서 뉴욕필하모니를 처음으로 지휘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지휘자이기에 미국인들은 그에게서 자긍심을 얻었다.
번스타인은 미국인으로서 뉴욕필하모니를 처음으로 지휘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지휘자이기에 미국인들은 그에게서 자긍심을 얻었다.사진=ⓒ잭 미첼.

 그의 아버지 사무엘도 16세 어린나이에 미국 입국행렬에 줄을 섰다.

그는 유대인이다. 수천년 동안 천대받아온 서러운 민족. 유럽 모든 사람들에게 냉대받고 인간이하 취급을 받던 그들의 유일한 탈출구이었다. 기회가 평등한 미국은 그야말로 꿈과 같은 나라다.

번스타인의 부모들은 억척스럽게 일해 자립의 토대를 쌓았다. 그러나 집안 분위기는 엄격했다.유대인 특유의 규율과 교육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젊은 유대인들의 분출구가 필요했다. 바브라 수트라이샌드도 그랬고. 우디 앨런, 아서 밀러 등 대부분의 유대인 청소년들은 그렇게 집을 뛰쳐 나갔거나 뛰쳐나가려 노력했다. 그들은 영화와 음악, 그리고 연극에서 자유를 찾았다. 뉴욕은 그런점에서는 이상향이었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식들이 고생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무엘도 레너드는 자식들이 사업가나 일반적인 샐러리맨과 같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 아들 레너드(약칭 레니)는 어릴 때부터 병약했지만 감수성이 남달랐다. 그 자신도 "나는 비참하리 만큼 마음이 약한 어린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8세 때 어느 일요일에 부친을 따라 유대교의 교회에서 오르간의 연주와 합창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미 그는 천부적으로 피아노의 음악 선율에 대한 감각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그 후부터 고모네 집에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레니의 부모는 레니가 음악가가 되려는 꿈을 끝까지 반대한다. 그러나 피아노의 레슨을 받는 일 만큼은 허락해 주었다.

 피아노 연주 재능은 보통을 넘어섰다. 흥분할 정도로 만족해 하는 표정으로 건반을 눌렀다. 어린 소년 레너드는 피아노 소리엔 혼을 뺏겼다. 천식이 심했지만 예민한 감각을 지녔다. 또 똑똑하고 지성적인 학생였다. 하지만 주변 이웃들로부터 유대인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자랐고 이를 극도로 무서워했다.

 그런 두려움을 피아노를 치면서 극복해 나갔다. 그리고 그 피아노 소리와 평생 가겠다고 다짐하면서 그 곳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만의 세상을 찾았고 마음도 굳세졌다. 누구에게도 당당해졌다. 자신만의 우주를 찾았다. 그 우주는 바로 음악이고 그 안에 있을 때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는 음악에 정열을 불태웠다. 1939년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음악원에 입학한다. 작곡과 피아노 연구에 몰두한다. 1940년과 커티스 음악원을 졸업한 1941년에 콘서트 지휘 부문의 장학금을 타고 지휘 지도까지 받았다. 다음해에는 탱글우드에서 대지휘자의 어시스턴트를 맡는다.

거기까진 그래도 탄탄대로였지만 역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정되었던 보스턴 교향악단에서의 데뷔는 미뤄졌다. 이 오케스트라와 미국 음악가 조합과의 알력 때문에 취소가 됐다. 일 없이 빈둥거렸다. 작곡 콩쿠르에 응모한 자작 교향곡도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라 1943년엔 탱글우드의 버크셔 음악 센터도 문을 닫았다.

그 때 숨 쉴 구멍이 생겼다. 1943년 8월 25일 번스타인의 25세 생일에, 그는 한 중개인을 통해 뉴욕 필하모닉의 신임 음악 감독인 로진스키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생각지도 않게 이 오케스트라의 어시스턴트 지휘자로 임명된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11월 어느날 번스타인은 뉴욕 필하모닉의 정기공연에서 급성 발병으로 출연이 어려워진 발터의 대역을 맡는다. 행운이었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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