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3:00 (수)
김수근 大成 창업주의 도전정신 "가보니 길이 있더라"
김수근 大成 창업주의 도전정신 "가보니 길이 있더라"
  • 고윤희 이코노텔링 기자
  • yunheelife2@naver.com
  • 승인 2019.10.02 12: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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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수공권으로 창업한 연탄 사업을 토대로 미지의 사업영역 두드렸던 도전정신
남의 돈 안 써 사업기회를 놓치기도 했지만 '기업의 영속성'을 경영가치로 믿어
일제 강점기 연탄외판원으로 가계를 도우며 주경야독… 일본대학 최우등 졸업
세 아들이 영역 나눠 독립 경영… ' 대성그룹 ' 간판은 3남 김영훈 회장이 이어가

‘가보니 길이 있더라’. 대성그룹의 초석을 놓은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2001년 작고)의 도전정신이 녹아있는 말이다. 김 창업주가 숱한 역경과 좌절을 딛고 사업영역을 넓히는 과정에서 얻어낸 '경영의 지혜'이기도 하다.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는 2000년 가을 창립50주년 행사를 치르고 한달 뒤 경영은퇴를 했다.  '인생을 유한하지만 기업은 영속해야한다'는 믿음이 강했다. 사진= 대성.
김수근 대성그룹 창업주가 1997년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연설하는 장면. 그는 "땅장사로 돈을 벌 생각을 하지말라"고 언명하는 바람에 창립50주년 무렵에야 서울 관훈동에 그룹 사옥의 터전을 마련할수 있었다. 사진= 대성 제공.

김 창업주는 1947년 대구의 어느 제재소 한 켠에 50평규모의 공장을 마련하고 창업의 깃발을 꽂았다. 손으로 연탄을 찍는 수동기계 10대를 갖고 시작해 국내 굴지의 종합에너지 업체로 키운 그는 2000년 늦 가을의 어느 날 세 아들을 불렀다.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직감한 그는 유언처럼 이렇게 말했다.

우선 경영 은퇴의 의지를 밝혔다. 그 다음 “나는 평생 남의 돈을 쓰지 않고 항상 예비자금을 비축했다. 너희들의 능력이 못 미칠 땐 과감하게 전문 경영인에게 맡겨라”라며 회사의 영속성을 강조했다. “인생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영속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멀쩡하던 기업이 하루아침에 쓰러지는 것을 많이 봤던 그는 ‘기업의 생존’을 가장 중히 여겼다.그러면서 도전정신을 일깨웠다. 늘 듣던 이야기이지만 세 아들은 그날 따라 새롭게 들렸다고 한다

대구 공립 상업학교 시절의 김수근 창업주.
대구 공립 상업학교 시절의 김수근 창업주.

. “가보니 길이 있더라. 새 사업을 시작할 때 두려움은 없어야한다.  내가 여러 사업에 손을 댔지만 일단 일을 시작하면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문제도 풀 길이 열리더라. 물론 운도 따른 결과지 .”  자신의 선택한 길을 뚜벅뚜벅 따라 가다보면 고난도 겪겠지만 우연히 새로운 길도 보이고 뜻밖의 해법도 생긴다는 가르침이다.  

 70년대 후반 김 창업주는 유럽 산업 시찰에 나섰다. 광산개발 사업 등이 정상궤도에 올랐지만 그룹의 미래 사업에 늘 아쉬움을 느끼던 김 창업주로선 해외기업의 생존전략에 대한 벤치마킹이 필요했다.

당시 대성의 사업구조는 ‘겨울 한 철 사업’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임원들에게 “사시사철 되는 장사가 없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종종 했다. 그런데 그 출장길에 산업혁명을 이끈 런던이 쇠퇴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패권이 넘어간 결과였다. 귀국행 비행기 좌석에 앉은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김수근 창업주가 40대 초반 무렵, 평생의 반려자 여귀옥 여사(왼쪽)와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음악도였던  여귀옥 여사는 대성의 청업초기에 사업아이디어를 내는 등 대성이 초석을 닦는데 일조 했더.
김수근 창업주가 40대 초반 무렵, 평생의 반려자 여귀옥 여사(왼쪽)와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음악도였던 여귀옥 여사는 대성의 청업초기에 사업아이디어를 내는 등 대성이 초석을 닦는데 일조 했다.

눈을 감고 여러 생각에 잠기던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옆자리 좌석표를 손에 쥔 서양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 창업주가 일본인으로 인식했던지 일본말로 인사를 건넸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프랑스 은행가였다. 아시아 투자를 담당하는 글로벌 뱅커였다. 김 창업주의 사업 영역에 대해 한 수를 뒀다. “석탄은 앞으로 전망이 없습니다. 프랑스와 일본에선 액체산소가 유망 업종이지요.”

김 창업주의 귀가 번쩍 뜨였다. 머리 속에 메모를 했다. 이 인연은 훗날 산업의 에너지원인 액체산소를 만드는 대성산소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다. 액채산소는 산업체에서 긴용하게 쓰이는 에너지원이다. 오늘날에는 로켓추진연료로도 사용된다. 물론 김 창업주가 벌인 사업이 다 잘 된 것은 아니다. 새 길을 찾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통신과 미디어 사업에 나섰다가 쓴 맛을 경험했다. 경기케이블TV 사업과 TRS(주파수 공용통신)이다.

김 창업주는 2000년 11월 1일 그룹경영을 세 갈래로 나눠 세 아들에게 넘기면서 은퇴했다. 회사의 '생존'를 위한 용단이었다. 김창업주가 그룹을이끌기에는 세상은 물론 사업 판도가 판이해졌다고 생각했다. 건강도 발목을 잡았다.

2000년 늦가을 김수근 창업주가 경영은퇴 이임 행사를 끝내고 사옥을 나서기 전 모자를 흔들면서 임직원들의 환송에 답을 했다. 그는 세 아들에게 '가보니 길이 있더라'는 도전정신을 남겼다.
2000년 늦가을 김수근 창업주가 경영은퇴 이임 행사를 끝내고 사옥을 나서기 전 모자를 흔들면서 임직원들의 환송에 답을 했다. 그는 세 아들에게 '가보니 길이 있더라'는 도전정신을 남겼다.

 세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날 이임사에서 “53년을 함께해온 대성의 일선에서 떠나는 섭섭함이 있지만 새로운 경영체제로 출발하게 되는 대성호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며 사옥을 떠났다. 이임식 자리에는 세 아들이 함께헸다. 그 며칠전 김 창업주가 이야기한 말을 상기했다. ”나는 경영에서 손을 뗀다. 너희들에게 계열사를 나눠 주겠지만 누구든지 내 소유라는 생각을 버려라. 국민에게 사랑 받는 기업이 되도록 하라. 기업이 이익을 못 내면 사회의 죄악이란 점을 명심하라“

 김 창업주의 첫 직업은 석탄회사 외판원이다. 가세가 기울어져 일제 강점기에 식구들을 돌봐야 했다. 그런데 그 일이 훗날 연탄회사를 창업하는 계기가 될 줄 그 자신도 몰랐다. 그는 우선 공부가 하고 싶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석탄회사에서 성실성을 인정받아 외판원에서 단숨에 경리를 담당하는 직원이 됐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배움에 대한 고픔이 있었다. 일본대학 법학과로 유학을 떠난다. 하지만 집안 형편과 건강때문에 고교를 중퇴했던 탓에 일본에서의 공부는 쉽지 않았다.

각각의 사업 영역에서 독립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성그룹'이란 상호는 3남인 김영훈 회장(사진)이 이어가고 있다. 김 회장은 세계최대 민간에너지 기구인 WEC의 회장직을 지난달말까지 3년간 수행하는 등 세계 에너지 산업계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대성그룹 2세 3형제는 각각의 사업 영역에서 독립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성그룹'이란 상호는 3남인 김영훈 회장(사진)이 이어가고 있다. 김 회장은 세계최대 민간에너지 기구인 WEC의 회장직을 지난달말까지 3년간 수행하는 등 세계 에너지 산업계의 리더로 활약하고 있다.

낮에는 대학강의를 듣고 밤에는 고교과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대학은 ‘고교 졸업장’을 조건으로 내건 가입학 상태였기 때문이다. 역경은 그를 단련시켰다.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을 했고 현재 마이니치 신문사의 전신인 일본 니치니치신문사의 입사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직감하고 기자의 꿈을 접었다. 귀국 후 조선총독부 재무국이 실시하는 금융조합 이사 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농촌과 농민을 돌보는 일이어서 신이 나게 일을 했다. 하지만 해방직후 극심한 사회갈등을 빚는 모습을 보고 홀연히 회사를 떠났다. 적수공권으로 창업해 독립했다. 1947년 5월10일 ‘대성광업공사’란 연탄회사의 간판을 내걸었다.

주변에선 엘리트가 연탄장이가 됐다고 수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대성의 약진은 눈부셨다. 광산투자-해외자원 개발-석유유통-공업용 산소-도시가스 사업진출 등으로 사업기반을 넓혔다. 에너지 중심의 그룹으로 변모했다. 남의 돈을 쓰지 않는 바람에 때론 사업기회를 놓치기도 했으나 한 발이 늦으면 늦은대로 기회가 또 있다고 김 창업주는 믿었다.

 ‘가보니 길이 있더라’란 김 창업주의 가르침은 대성그룹이 2007년 5월 창업 60주년을 맞아 펴낸 ‘김수근 창업주의 일대기’의 책 제목이 됐다. 현재 대성은 김 창업주의 뜻대로 3남이 각각 독립경영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대성이란 그룹의 간판은 3남인 김영훈(67) 회장이 이었다. 그는 세계 최대 민간에너지 기구이자 글로벌 에너지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쥔 세계에너지협의회(WEC)회장직을 지난달 말까지 3년동안 이끄는 등 세계 에너지 산업계의 의 리더로 활약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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