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0:05 (수)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⑨'러시아혁명'의 일본상륙
영화로 쓰는 세계 경제위기사(16) 대공황과 일본…'마지막 황제'⑨'러시아혁명'의 일본상륙
  • 이코노텔링 이재광 대기자
  • jkrepo@naver.com
  • 승인 2023.05.1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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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이탈리아는 자본가 계급과 정치인들이 합세해 지식인과 노조 말살
1920년 일본 ' 사회주의 동맹 '이 만들어지고 2년 뒤에는 '일본공산당' 출범
급기야 '치안유지법' 통과시켜 중산층에 공산주의 세력이 침투 못하게 차단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 세력 척결'은 일본에게도 발등의 불이 되고 만다. 192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본 사회주의 세력의 조직화는 기득권층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 사회주의 세력을 몰아내려 했을까? 1925년 동시에 추진된 '치안유지법'과 '보통선거법'에 그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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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1911년에서 1920년대까지 일본 민주화의 진전, 즉,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알아봤다.

그들은 ➀1913년 군부의 중국침탈을 막은 '제1차 호헌운동', ➁1912년 한 헌법학자가 제기한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과 그에 따른 천황의 권능에 대한 재인식, ➂1917~18년에 발생한 '쌀소동'과 평민 총리의 등장, ④1919년 보통선거권에 대한 욕망이 담긴 대규모 시위 ⑤1923년 귀족원 출신 총리ㆍ내각의 등장과 이를 물리친 '제2차 호헌운동' ⑥1919~21년 사이 펼쳐진 여성운동 및 여성참정권 운동 등이었다.

2022년 9월 일본공산당창립 100주년 기념 강연 포스터. 일본 공산당은 1922년 9월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창립됐다.
2022년 9월 일본공산당창립 100주년 기념 강연 포스터. 일본 공산당은 1922년 9월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창립됐다.

이들은 확실히 일본 정치ㆍ사회사의 맥락에서 중요하다. 1910~20년대 일본 민주화의 진전에 한 몫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던 일본이 1925년을 맞는다. 이 해는 일본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매우 상반돼 보이는 두 가지 법적 조처가 취해졌는데, 민주화의 초석이자 시민권 발흥의 정점인 '보통선거법'과 시민의 권리를 대폭 제한하는,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이 동시에 채택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외관상으로만 '상반된 것'일뿐 내면적으로는 같은 맥락으로 읽힐 수 있다는 성격을 갖는다.

우선 '치안유지법'부터 살펴보자. 가장 중요한 배경은 1917년의 러시아혁명이다.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러시아혁명이 세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사회주의혁명이 '이상(理想)'이 아닌 '현실'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이제 사회주의 세력은 그 어느 때보다 열성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동지를 규합할 수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생겨났고 이들은 공산주의의 맏형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다른 열강의 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이 갖게 된 불안과 두려움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은 그 자체로 기득권의 종말과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했다. 자본가 계급과 사회주의 세력을 싫어하는 정치인들이 어울리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들은 노조, 지식인, 학생 등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는 세력을 말살시켜야 했다. 유럽에서 그 같은 성향이 두드러진 나라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이었다. 이들의 공통점? 바로 파시즘이었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일본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1920년에는 '일본 사회주의 동맹'이 만들어졌고 1922년에는 비록 비합법적이기는 하지만 '일본공산당'이 출범하기도 했다. 당연히 노동자, 농민 등 하층민들이 주체 세력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직적이었다. 이들은 '사유재산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며 자본가 등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나온 것이 '치안유지법'이었다. 사회주의 세력의 집회, 소요, 봉기 등 혁명의 근저(根底)를 없애겠다는 의도였다. 1925년 4월 21일 공포된 이 법안은 실상 1922년 시작된 유사 법률의 내용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해 '과격사회운동단속법안'이라는 이름으로 채택된 법안의 핵심은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 기타 그와 관련된 국헌(國憲)을 문란하게 만드는 결사나, 그 선전과 권유를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1925년에 제정된 '치안유지법'은 1922년 법안의 연장선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온한 언동 또는 타인을 선동하고 교사 또는 이용하거나 타인의 행동에 간섭하여 치안을 방해하는 자",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가 공동으로 안녕과 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하고자 하는 자", "국체를 변혁하거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 등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담고 있다.

1928년 ‘보통선거법’에 의거한 일본의 첫 선거.
1928년 '보통선거법'에 의거한 일본의 첫 선거.

이제 보통선거법의 입법 과정을 보자. 일본의 보통선거법으로의 진행은 유럽 열강에 비해 다소 늦은 감이 있다.

메이지유신 직후 유권자는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했다. 20세기 들어 좀 늘었다고는 해도 1917년 기껏 2.6%였다. 1919년 하라 다카시(原敬)라는 평민 총리의 등장으로 자극을 받은 민중이 시위를 통해 다시 한 번 그 수를 두 배로 늘렸다고는 하지만 아직 유권자 수는 300만 명에 불과했다. 민중의 정치 참여 욕구는 지속적으로 터져 나왔고 선거권 요구는 갈수록 치열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1920년대를 맞는다. 러시아혁명의 성공으로 일본에서도 무정부주의자, 급진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기득권층 입장에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이미 '세계 5대 강국'이었다. 러시아혁명을 보는 시각이 구미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일단 사회주의 세력의 손발을 묶을 게 필요했다. '치안유지법'의 골격을 만들기 시작한 배경이었다.

문제는 중산층이었다. 이들이 만일 공산주의 세력에 넘어간다면?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가능해 보였다. 불평불만이 많으면 기득권에 도전장을 내밀 가능성도 있었다. 이를 막으려면? 바로 이 대목에서 '계급대타협'이 등장한다. 빈곤층을 배제한 중산층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함으로써 이들을 기득권층에 '편입'시키고 '치안유지법'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겠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일본 내 유권자 수는 파격적으로 늘었다. 일본 내 25세 이상 남성 중 빈곤층을 제외한 모든 이가 투표권을 갖게 됐던 것이다. 이는 이 법 제정 후 첫 선거가 치러진 1928년 기준 1240만 명으로 6200만 명에 이르던 전체 인구의 약 20%에 해당되는 수치였다. 1924년 유권자가 전체인구의 6%인 330만 명 수준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3.5배나 늘어난 것이었다.

이때의 '보통선거법'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선 '빈곤층 배제'다. 이들은 왜 배제시켰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공산주의 세력과 쉽게 밀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가 상당했다는 점이 둘째다. 기탁금 제도, 사전선거운동 규제, 선거운동원의 수 제한 등 다양한 규제가 전제조건이 됐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은 철저히 외면됐다는 점이다. 이를 토대로 우리는 1925년 보통선거법이 '완전한 보통선거제'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치안유지법'과 '보통선거제'의 상호작용에 대해 생각할 때다. 1928년 2월 선거는 일본 내에서 보통선거법에 의거해 치러진 첫 번째 선거다. 이때 놀라웠던 점은, 빈곤층을 제외시켰음에도, 사회주의 세력이 의원을 8명이나 배출시켰다는 사실이다. 자칫 공산당 등 사회주의 세력이 공식ㆍ공개적으로 정권을 가져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길 만 했다.

이것이 바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내각이 '치안유지법'을 들고 나온 배경이다. 선거를 치른 직후였던 1928년 3월 15일 정부는 동법 위반을 이유로 일본공산당과 노동농민당 등 사회주의 관계자 등 1652명을 체포했다. 이것이 이른바 '3ㆍ15사건'이다. 이로써 선거결과에 고무됐던 일본의 사회주의 세력은 순식간에 그 힘을 잃고 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체포를 피한 일부 세력이 다시 일본 내 공산당 재건을 꾀하자 내각은 다시 한 번 사회주의 세력의 척결을 시도했다. 1929년 4월 16일 일제 검거령이 떨어지고 이번에는 좌익 4942명이 체포됐다. '4ㆍ16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는 사회주의 세력 척결로 1930년 초에 이르면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은 거의 궤멸 상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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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광 이코노텔링 대기자 ❙ 전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 사회학(고려대)ㆍ행정학(경희대)박사 ❙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뉴욕주립대 초빙연구위원, 젊은영화비평집단 고문, 중앙일보 기자 역임 ❙ 단편소설 '나카마'로 제36회(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신인문학상 수상 ❙ 저서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사』『영화로 쓰는 20세기 세계경제사』『식민과 제국의 길』『과잉생산, 불황, 그리고 거버넌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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