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29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99)김학렬 없는 이임식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99)김학렬 없는 이임식 12월 말 쓰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박통에게 "제발 물러나게 해달라"고 다시 간청하였다. 집에서 며칠 쉬면서 몸조리를 한 후 부총리를 계속하라고 권하던 박통도 그의 완연한 병세에 더는 부총리 속행을 강권하지 못했다. 1972년 1월 4일 부총리가 태완선 건설부 장관으로 교체되었다. 석별을 하면서 박통은 "집에서 요양하면서 건강을 되찾아 다시 일해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그게 그가 마지막으로 대한 박통이었다.1월 6일 부총리 이취임식에는 쓰루가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 서울대병원으로 옮겨 입원한 상태였다. "2년 이코노텔링 독점연재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2022-09-20 11:00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98)입원 중 국회서 호출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98)입원 중 국회서 호출 쓰루는 늘 소화 기능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웬만한 소화 불량은 1961년 봄의 위궤양 수술 후유증으로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1971년 8월 도쿄에서 열린 제5차 한일각료회담 기간 동안 쓰루가 느꼈던 불편함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총리라는 자가 4대 핵공장 경제 협력 유치, 물가 등 선거 후유증 해소라는 발등의 불을 두고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차일피일 병원 방문을 미루던 차에 서재털이 사건이 쓰루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최고 관료로서의 권위와 더불어 그의 병세 또한 호전 불능 상태로 치달았다.비록 해임 이코노텔링 독점연재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2022-09-06 09:00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97)오원철의 청와대行 [독점 연재] 김학렬 일대기(97)오원철의 청와대行 쓰루가 매사에 미다스의 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4대 핵공장 건설사업이 그랬다. 일본은 제5차 한일각료회담에서의 합의, 특히 '4대 핵공장 건설사업에 약 8000만 달러의 장기 저리차관을 제공한다'는 합의의 이행에 시간을 끌었다.일본의 시간 끌기에 쓰루는 새로운 또는 추가적 차관 선으로 노르웨이, 스웨덴 등으로 눈을 돌려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선산업 협력에는 긍정적이었지만 여타 4대 핵공장 사업 협력에는 소극적 반응 이상을 보이지 않았다.한반도 주변의 안보가 날로 불안을 더해가는 가운데 11월 10일, 쓰루는 박통에 이코노텔링 독점연재 | 김정수 전 중앙일보 경제 대기자 | 2022-08-23 11:00 처음처음이전이전12345678910다음다음끝끝